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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예지(의 카메라)를 향한 변명 -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에서 본 <가능한 사랑>

사진제공 넷플릭스

누군가의 요청으로 해고자의 장례식장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예지(조여정)의 카메라가 멀찍이 보인다. 술을 마시느니 마느니 하는 호석(설경구)과 미옥(전도연)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자, 어느새 카메라의 거리가 달라져 있다. 호석은 가까이 다가온 카메라를 발견하고 거부 의사를 밝힌다. 그날 이후 예지는 호석이 자신의 카메라 앞에 서주기를 바라며, 그의 아내 미옥을 통해 관계를 만들어가려 노력한다. 누군가는 찍고, 누군가는 찍혀야 한다. 인물 혹은 사건을 담는 다큐멘터리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현실의 독립다큐멘터리 제작 현장에서 감독은 자신이 찍고 싶은 인물이나 대상과의 관계를 쌓기 위해 카메라 없는 시간을 꽤 오래 보내기도 한다. 찍히는 사람은 이 사람이 신뢰할 만한 감독인지 탐색하고, 감독 역시 그에 대한 신뢰를 쌓아간다. 그렇게 서로의 세계가 뒤섞이고, 충돌하기도 협력하기도 하며 작업은 진행된다. 하지만 <가능한 사랑>의 예지는 다큐멘터리스트로서 무척이나 서툴게 설정된 캐릭터다. 이창동 감독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라기에 일부러 과장해 그런가 싶다가도 ‘굳이’ 싶을 만큼 예지를 단순하게 그려낸다. 찍는 사람의 숙명에 대해 깊은 고민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예지를 조금 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냈으면 어땠을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던 미옥과 예지. 미옥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예지는 미옥에게 조심스레 인터뷰를 부탁한다. 예지는 차에서 카메라와 삼각대를 꺼내와 인터뷰 촬영을 준비하고, 미옥은 카메라를 크게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옥과 예지 사이에 촬영 동의 과정이 특별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인터뷰를 해도 좋다는 미옥의 승낙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독립’다큐멘터리 현장에서는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요즘은 조명까지 세팅한 인터뷰를 미리 준비해 진행하는 사례도 많지만 대체로 1~2인 제작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다큐멘터리의 현장에서는 인터뷰가 갑작스레 성사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수음이 제대로 안되거나 놀랍게도 REC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잊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영화 속 예지도 그랬던 걸까. 카페에서 미옥을 인터뷰하며 와이어리스마이크는 채웠지만, 캠코더에는 수신기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예지는 그날 촬영을 마치고 편집실에서 촬영본을 확인하다가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대상과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울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 작업에서는 자신이 찍는 대상에 어떤 의미로든 커다란 감정을 갖게 된다. 사랑이 될 수도 있고 미움이 될 수도 있다. 지켜보고, 곁에 머물고, 서로를 알아가는 동안 자신이 찍고 있는 사람이 어느 순간 유난히 ‘특별해’ 보이기 시작한다. SP중공업 해고와 관련한 노동다큐멘터리를 찍기로 마음먹은 예지는 제작지원 심사에서 노동자 개인의 삶을 통해 구조를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상우(조인성)에게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을 ‘사랑’하고 싶다고 한다. 자기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니까”라고 덧붙인다. 예지의 그 말이 불편했던 것은 촬영 현장에 명품 백을 메고 오거나 부자 남편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랑’을 말하고, 노동자를 ‘위한’ 영화를 찍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지나치게 무감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지의 다큐멘터리가 실패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잘 알 수는 없는 것이니까. 작업을 통해 미옥과 호석, 철이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부대끼면서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라는 추상적인 마음이 ‘그 사람들과 함께 비를 맞겠다’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 작업의 매력이자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미옥이 일하는 마스크 공장에 찾아온 예지는 사장을 설득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미옥의 예상과 달리 수월하게 촬영 허가를 받는다. 일하는 모습이 단조로워 별로 재미가 없다는 예지의 말에 미옥은 노조를 만들겠다고 하며, 노동조합 창립총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너무 순탄해서 오히려 다큐멘터리적으로는 재미가 덜한 장면이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카메라의 권력을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미옥의 모습은 여러 의미에서 필요한 장면이었을 것 같다. 영화는 예지를 통해 ‘찍는 사람’의 윤리를 반복해서 묻는데, 타인(의 고통)을 찍는 행위가 가진 태생적 한계 혹은 원죄에서 비롯된 이 고민은 끝내 해소되지 못한다. 해소할 수 없는 고민 앞에 주저앉은 듯 보이는 영화가 때로 답답했다. 해소할 수 없으니 그만하자고 할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착취하는 카메라가 되지 않기 위한 시도나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일방적인 관계란 없다. (고통을 가진) 타인을 찍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관계를 맺다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고, 관계가 덜거덕거리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답에 가장 가까운 실천일지 모르겠다.

독립영화가 뭐냐는 미옥의 질문에 상우의 입에서 나오는 뻔히 보이는 답을 들으며 여러 현장에서 고군분투 중인 동료들이 떠올랐다. 돈이 있든 없든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카메라를 드는 사람들. 내가 활동하고 있는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은 현장 노동자와 투쟁하는 사람들, 연대하는 시민이 마음을 모아 미디어 활동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카메라 앞에서 고통을 꺼내본 적 있는 사람들이 카메라 뒤의 사람들을 염려하며 만든 연대체라는 점이 특히 의미 있다.

독립영화는 ‘돈 없이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공동체의 힘을 믿고, 날카로운 질문을 품고, 사람들과 함께 끝까지 달려가 완성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사건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호석은 예지의 카메라 앞에서 “연대, 투쟁 같은 것들 다 거짓말 같다”라고 절규하며 토해내듯 말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거짓말 같은 것들’이 현실에서 가진 힘을 먼저 떠올렸다. 오랜 해고와 투쟁, 연대의 시간을 지나 2018년 12월31일, 10년 만에 공장으로 출근하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모습을 촬영하던 날이 생각났다. 복직 당사자뿐 아니라 10여년의 시간을 함께 견뎌온 많은 사람이 모였고, 입김 너머로 울고 웃으며 거짓말 같은 아침을 보냈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카메라도 그날만큼은 REC 버튼과 셔터를 경쾌하게 눌렀다.

집으로 돌아온 미옥은 예지에게 보내다 만 문자의 전송 버튼을 눌렀을까. 미옥이라면 그랬을 것 같다. 상우의 별장에서 미옥은 변했고, 한 걸음 나아갔으니까. 예지 역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카메라 뒤에서의 경험을 통해서일 것이다. 미옥이 노동조합을 만들던 날의 촬영본을 모니터링하면서, 정주노동자보다 더 많은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에서 왜 이주노동자는 조합원으로 함께하지 않는지 미옥에게 물어보는 날도 있을 것이다. 정리해고의 상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호석의 이야기를 조금 더 따라가며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보면, 언젠가 SP중공업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게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찍는 것을 그만두지 않을 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