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3일, 이명세 감독이 <란 123>예고편을 공개했다. 후반작업 지원을 위한 펀딩 페이지도 열었다. 그가 총괄 크리에이터를 맡아 서울예술대학교 동문 연출자들과 합심한 앤솔러지 <더 킬러스>가 개봉한 지 어언 1년이 지나 들려온 신작 소식이다. 직전작으로 단편을 발표한 그가 <M>(2007) 이후 오랜만에 장편을 선보인다는 낭보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그 작품이 12·3 비상계엄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이다. 이명세 감독은 2011년 MBC 창사 50주년 특별 기획 다큐멘터리 시리즈 <타임>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장편 분량의 온전한 다큐멘터리 한편을 만들기는 처음이다. 그에게나 관객에게나 생경한 이 작업의 도화선이 된 시점으로 거슬러 오르고자 물었다. 2024년 12월3일 밤 10시 반,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2024년 12월, 불면에 시달리다
그날 저녁 이명세 감독은 <소방관>VIP 시사회에 참석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동료들과 뒤풀이를 즐길 계획이었으나 극장을 빠져나오다 믿기 어려운 연락을 받았다. ‘계엄’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80년대에 겪어봤으니까.” 그는 본능적으로 여의도에 가야겠다고, 집에 들러 두꺼운 패딩 점퍼라도 챙겨 입고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니 12시 반경. 식구들도 잠들지 못한 채 TV 속 여의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야 하나 갈등하며 생중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이,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새벽 1시.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이명세 감독은 회고했다. “그날 이후 각종 시사 프로그램을 중독적으로 보고 들었다. 가족, 친구들과도 사적인 안부 대신 ‘오늘은 또 새로운 뉴스 없었어?’ 하고 묻게 되더라. 정말이지 내란성 불면에 시달렸다.” 뒤이어 그가 쓴웃음으로 운을 뗐다. “혹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봤나. 그 주인공처럼 단 하루에 갇힌 기분이다. 눈만 뜨면 다시 12월3일인 것만 같다. 매일 영화를 편집하고 있으니 더욱.”
2025년 2월, 영화를 만들기로 하다
이명세 감독에게 그날을 영화로 남겨보자고 제안한 이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다. “한번 해보시라는 말에 알겠다고 했다.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예고편에 반드시 넣고 싶은 한컷을 보았기 때문이다. 12월3일 밤 충정로 <딴지일보> 사옥에서 잔업 중이던 직원이 찍은 푸티지에 담긴, 총을 멘 군인의 시선이 그것이다. 건물 주변을 맴돌며 카메라를 올려다보는 듯한 그 눈빛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일상에 찾아온 위협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장면이 되리라고 예감했다.”
그런 순간들을 엮어보겠다고 알리자 150여명의 시민이 손수 영상, 사진, 사연을 보내왔다. 국회의원들과 그 보좌진으로부터 현장 기록도 얻었다. 1인 미디어를 운영하는 유튜버들도 힘을 보탰다. 재료가 쌓이는 동안 이명세 감독은 모든 소스를 시간순으로 나열해 사건의 경과를 정리했다. 꼭 필요한 장면을 추리고 붙이는 과정에서 그가 주지한 것은 “현실의 드라마타이제이션”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본령이다. 영화학교 시절 배워서 잊지 못한다는 그 정의에 따라, 이명세 감독은 “그날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주 충실히 드라마타이즈”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리얼함에 치중하기보다는 히치콕의 몽타주처럼 시네마틱한 긴장감을 살리고 싶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코미디이기도 한 그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외국인의 눈으로 보려고 했다. 소위 정치 고관여층이 아닌 사람이 보더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뜻이다.”
그가 택한 방법은 말글을 최소화하되 이미지 언어로 사유하기. 그래서 <란 123>에는 여느 다큐멘터리에 흔히 나오는 재연, 인터뷰, 내레이션이 없다. “내 입장”처럼 읽힐 여지가 있는 문장은 과감히 생략하고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영상과 사운드 위주로 영화를 매만지니 어느덧 러닝타임은 80분에 수렴하는 중이다. 조성우 음악감독에게도 “음악이 내러티브가 될 수 있도록 1시간20분짜리 교향곡 하나를 작곡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명세 감독이 정한 음악 컨셉은 소리와 그림이 동기화된 듯 맞아떨어지는 미키마우징. 절묘한 스코어가 탄생할 수 있도록 “오늘내일 밤을 새워서라도 음악감독을 위한 편집본을 마감해야 한다”.
2025년 6월, 광주에 가다
장편 시나리오 하나를 완성하는 데 적어도 열달은 걸린다는 이명세 감독에게 이번 프로젝트는 “시나리오를 쓰는 동시에 편집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흐름에 몸을 맡기고 한컷 한컷 쌓아가다가도 새로운 영상이 등장하면 순서를 바꾼다.” 마땅한 콘티 없이 화질, 화각, 화면비가 제각각인 다량의 제보영상을 패치워크하듯 다듬어야 하니 말이다.
당연히 첫신을 찾아내는 과제도 만만치 않았다. 이명세 감독은 작업이 한창 진행된 2025년 초여름에서야 그 실마리를 발견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건넨 질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은 덕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12·3을 반추하며 광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크랭크인 전 고사를 치르듯, 그는 <란 123>의 무사 무탈을 기원하기 위해 망월동 묘역에 들렀다. 마침 6월28일 광주극장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4K 리마스터링 버전 상영 후 GV가 열리기도 해 동선을 짜기도 수월했다. 묘역과 극장을 오가니 “막이 열리고 닫히는” 옛 영화 관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원주 아카데미 극장을 지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광주극장을 스크린에 옮기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어졌다. 극장이 제공하는 비현실적 시공간도 <란 123>과 어울릴 것 같았다. 결국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은 장소이자 문화적 유산”인 광주극장이 오프닝 시퀀스를 장식하게 되었는데, 그 편집만 한달이 넘게 걸렸다.
2025년 12월, 염려하고 감탄하다
마지막 장면은 아직 고르지 못했다.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엔딩에는 으레 사건의 결론을 서술하는 자막이 나온다. 그런데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 매듭이 안 지어졌다. “공식을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이명세 감독이 <란 123>으로 도달하고 싶은 온도는 정해져 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다시 그런 사람을 뽑지 않을 수 있을까.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쓰인 첫 글자를 따서 제목을 지었는데, 지금도 ‘난중’이다.” 영화는 그만큼 서늘해질 테지만, 그건 감독을 감탄케 한 열기를 충분히 전달한 다음 일일 것이다. “빛의 전사들” 이야기다. “여러 푸티지를 통해 우리나라 국민이 참 대단하다는 걸 느낀다. 축제 같은 집회 장면들을 보면 이 난중도 오래 버틸 수 있겠다 싶다. 즐길 수 있으면 버틸 수 있다. 그 감각까지 전달하는 게 이 영화의 목표다.” 또 다른 목표는 2026년 3월에 개봉하는 것. 펀딩 후원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터뷰 직후 이명세 감독은 뜨끈한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뒤 작업실로 복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