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현장을 기록하려는 카메라의 시선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나아지지 않고 퇴보할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2017), <1984 최동원>(2020) 등의 동물·스포츠 관련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던 조은성 감독의 카메라가 이번엔 거리와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합니다>는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난 이후 국회와 광장으로 모여든 시민들과 지난 몇년의 사건을 현장 리포트에 가깝게 담아낸 작품이다.
- 12·3 비상계엄의 밤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매년 12월이면 만드는 길고양이 캠페인 영상이 있다. 그날은 밤새 영상편집 작업을 해야지 생각하고 있던 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 비슷하게 생각했겠지만 그 시각이 다가와서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다고 했을 때 농담 아닌가, 딥페이크인가 생각했다. 당혹스러웠다. 몇몇 지인들은 국회로 달려가기도 했다. 계엄이 해제된 후 현장 영상을 보고 이날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 그런 날이었다.
- 스포츠, 길고양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경험은 많아도 한국 정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것은 처음이다.
다큐멘터리 <무현, 두 도시 이야기>기획과 제작을 했으니 정치적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연출에 관심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2022년 대선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영상 기록 감독이어서 8명 남짓 되는 영화인 기록단과 함께 전국 유세를 기록했었다. 대선 패배로 사용되지 못한 영상이 외장하드에 담겨만 있다가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시민들이 광장에 응원 봉을 들고 나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올해 4월 헌법재판소의 파면 이후 조기 대선이 시작되면서 다시 한번 이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되던 날,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 시작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당선 시점부터다. 비상계엄 이후 주요 사건을 기점으로 한 타임라인을 따라가는 데 실시간 현장 기록은 얼마나 되나.
80% 정도는 직접 발로 뛴 현장 기록이다. 그 나머지가 이를 기록한 다른 영화인, 영상팀의 도움과 협조를 받았고 촛불행동 등 시민단체가 열었던 집회 기록 영상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2022년부터 최근까지의 기록 데이터로 치면 분량이 어마어마했다. 외장하드를 수도 없이 사서 보관하고 백업했다.
- 3년간의 기록에 비하면 러닝타임은 비교적 짧은 편이다.
편집하면서도 어떻게 이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놀랐다. 연출자로서는 이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전후 맥락을 짚어봐야 하지 않겠나. 괴롭고 힘든 작업이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 다 담을 수 없으니 굵직한 사건 중심의 텍스트 스크롤 방식을 채택했다. 단, 내 생각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 두 가지, 이태원 참사와 채 상병 사건은 별도로 다뤘다.
- <대한민국은 국민이 합니다>의 중심축은 시민 참여로 이룬 풀뿌리민주주의에 있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시민을 인터뷰했는데 인터뷰이의 선정 방식과 과정을 듣고 싶다.
정치인과 기자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다양한 연령대와 시선을 가진 사람들 위주로 꽤 오래 찾아다녔다. 섭외로 진행한 스튜디오 인터뷰만 해도 33명 정도다. 게다가 이번에 2030 여성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무엇이 그들을 광장으로 나오게 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면서 보통의, 상식적 시선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 12·3 비상계엄 후 등장한 다수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무엇을 차별화하고 싶었는지.
12·3 비상계엄 당일 한달음에 국회로 달려간 것도 시민, 헌법재판소의 공정한 판결을 기대하며 매주 그 추운 겨울 광장을 지켰던 것도 결국 시민이다. 그래서 이 다큐멘터리에는 내레이션이 없다. 인터뷰로 만난 시민들의 발언을 위주로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이야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 시작과 끝에 미국 정치 모델을 기반으로 쓴 <어떻 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인용한다. 이 다큐멘터리의 방향을 잡는 데 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있다면.
서두에 ‘민주주의를 잃는 것은 선거에서 패배하는 것보다 훨씬 비극적인 일이다’라는 문장은 물론 미국 정치 현상을 분석한 책에 나온 말인데 이를 인용한 이유는 한국에 빗대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답게 실천하는 국가는 대한민국과 대만 정도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 문장들이 너무 와닿았다. 12·3 비상계엄 이후 광장으로 나왔던 사람들의 수기와 사진집, 서적이 출간되었기 때문에 독파하면서 이들은 그간의 대한민국 사회를 어떻게 지켜봤는지에 대한 생각도 접할 수 있었다.
- 계엄 당시 상황과 그 이후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인터넷 스트리밍이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나.
만감이 교차한다. 이 다큐멘터리에도 유튜브 영상을 푸티지로 활용하긴 했지만 사유의 밀도는 당연히 다큐멘터리영화에 있지 않겠나. 유튜브는 양날의 검이다. 왜곡된 뉴스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플랫폼으로서는 훌륭하지만 그 반대쪽에는 가짜 뉴스를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도 쓰인다. 정보의 진실성에 대한 양극화는 앞으로 더 심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콘텐츠 강국으로 도약하는 것도 좋지만 AI와 미디어리터러시 교육이 현장에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사실을 왜곡되게 다루는 뉴스의 파급력이 점점 커지면서 세상의 정보를 유튜브로 접하는 지금의 10대, 20대가 우경화, 극우화되는 것이 두렵다.
- 12·3 비상계엄 이후 등장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생각은.
몇편의 다큐멘터리를 보았을 뿐이라 어떤 흐름을 짚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날을 다루는 극영화나 다큐멘터리, 드라마까지 계속 나와야 하고, 나올 것이라 생각하는 입장이다. 5·18 광주민주화항쟁이나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10대, 20대가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전두환이 저지른 만행을 알게 된 것처럼 역사적, 정치적 사건이 콘텐츠화 되는 작업은 중요할 수 있겠다. 이와 반대로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왜곡되게 그리는 것 또한 큰 문제가 될 거다. 아이들이 역사를 콘텐츠로 배우는 시대이니까.
- 한국 정치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
‘내 아이만 위해서는 내 아이를 지킬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공동체가 파괴되지 않도록 지켜내려면 우리 공동체만 지켜서는 안된다. 시민과 사회가 각각 의식을 높이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나의 다큐멘터리는 어떤 특정 사건을 밀도 있게 다뤘다기보다 2022년부터 최근까지 시민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담은 일종의 종합편에 해당한다. 누군가는 또 그 시기 안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보다 밀도 있고 보다 사적인 시선으로 만들 것이다. 개인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내려는 다큐멘터리스트가 다시 많아지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