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0일 기준 2025년 국내 최고 흥행작은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다. 567만 누적 관객수를 기록한 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뒤를 잇는 건 웹툰 원작 실사영화 <좀비딸>이다. 11월26일 개봉한 <주토피아 2>의 기세도 만만치 않은 가운데 <F1 더 무비><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까지가 5위권에 안착한 걸 보면 12·3 비상계엄 이후 극장을 논하기란 다소 어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회복될 기미 없이 하향 평준화된 박스오피스나 마니악하게 여겨지던 장르의 성행을 이슈 삼는 게 아니다. 통계만 봤을 때 극장은 지난 2024년 12월3일 밤을 기점으로 강화된 국민적 혼란과 유리된 공간이었던 것 같다. TV가 속보를 실어나르고, 신간 서적들이 스펀지처럼 세태를 흡수한 것과는 비교된다. 스크린 속 혈귀, 좀비, 악마의 출현이 더는 낯설지 않다는 감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건 매체 특성이다. 영화는 언제나 뉴스보다 늦게 도착한다.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는 장편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시나리오를 집필한 뒤 배우를 캐스팅하고, 제작비를 모으고, 촬영과 편집까지 마쳐야 하는 극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다르다. 시의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재빠르게 12·3 비상계엄 이후 정국을 찍은 논픽션들이 지난 1년간 극장을 찾았다. 당장 지난 12월3일에도 비상계엄 1년을 맞아 <비상계엄>이 개봉했고, 내년 1월 개봉을 앞둔 <대한민국은 국민이 합니다>가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언론·배급시사회를 열었다. 제30회 인천인권영화제도 그날에 맞춰 <우리는 광장에서>를 틀었다.
탄핵과 대선 사이 쏟아진 다큐들
일명 ‘포스트 계엄’ 다큐들이 비상계엄 실패 1년을 기념하는 날에만 고개를 든 건 아니다. 2024년 12월 첫주를 지나고부터 윤석열 정권을 다룬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건희를 둘러싼 논란을 파헤친 <퍼스트레이디>가 스타트를 끊었다. 탄핵 심판과 조기 대선을 잇는 2025년 4월부터 6월 사이에는 한주에 한편꼴로 정치 관련 다큐가 공개되었다. <뉴스타파>가 제작한 <압수수색: 내란의 시작>,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를 앞세운 <다시 만날, 조국>은 물론 윤석열이 지지자들과 함께 관람하면서 화제가 된 <부정선거, 신의 작품인가>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그중 <부정선거, 신의 작품인가>는 이영돈 전 채널A 제작본부장과 전직 한국사 강사 전한길이 기획한 것으로, 제21대 총선이 부정선거였다고 설파한다. 개봉 직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영화의 주장을 12개 항목으로 나눠 일일이 반박한 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의혹의 대부분은 이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설명하거나 법원의 판결로 해소된 사항임에도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으로 부정선거 음모론을 부추기고 있어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윤석열과 비상계엄을 옹호하는 세력의 작품 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2024년 2월 개봉해 117만 관객을 동원한 <건국전쟁>의 성공 전략을 따르는 중이다. 그 전략은 한마디로 역사를 왜곡해서라도 지지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 이승만과 박정희를 영웅화하며 독재를 낭만화하고, 공산주의 척결을 위해서라면 계엄도 필요하다는 관점은 위험할지언정 꾸준히 재생산되었다. <건국전쟁2>를 비롯해 <하보우만의 약속><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국가초기화>가 그 예다.
그러나 과거를 호명하는 전략은 한쪽의 전유물이 아니어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리셋>, 친일 잔재를 살핀 <망국전쟁: 뉴라이트의 시작>, 흉상 철거 논란이 불거졌던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독립군: 끝나지 않는 전쟁>도 관객을 만났다. 첫삽을 떴을 때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 작품들 또한 안팎으로 계엄을 의식해야 했다. <건국전쟁>에 대항하는 듯한 제목을 지은 <망국전쟁: 뉴라이트의 시작>의 구진형 감독은 지난 7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12·3 비상계엄 사태가 터지면서 시나리오의 7할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박봉남 감독의 <1980 사북>은 “12·3 비상계엄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사북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과감한 홍보 문구를 내세웠다. 1980년 강원도 정선 사북에서 벌어진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과 이를 은폐하려 한 국가 폭력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국가에 대한 영화인 318명의 사과 촉구 성명서를 낳기도 했다. 이처럼 2025년 이후 한국 현대사 다큐멘터리와 12·3 비상계엄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는다. 의도치 않았더라도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여지가 발생한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이후 세대를 막론하고 갱신된 전 국민적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극장은 광장이 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영화 중 누적 관객수 10만명을 넘긴 작품은 전무하다. 12·3 비상계엄 이후 공개된 윤석열 정권 관련 다큐멘터리영화 10편과 한국 현대사 관련 다큐멘터리영화 10편의 모든 관객수를 합쳐도 50만명이 채 안된다. 작금의 극장가에서 다큐멘터리가 상영관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확보하더라도 객석이 차기 어려운 오전 시간대에 상영 회차가 편중된다. 그러니 지난 1년간 극장이 현실과 접하지 못한 것 같다는 감각은 12·3 비상계엄과 유관한 작품들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다. 이 시기 시민들의 입에 가장 자주 오르내린 영화는 어쩌면 2023년 11월 개봉해 천만 관객을 훌쩍 웃도는 성적을 받아든 <서울의 봄>이 아니었을까. 영화가 재현한 1979년 12월12일에 2024년 12월3일을 겹쳐보기란 어렵지 않다.
2025년의 영화제들도 그 연결을 프로그램에 적극 반영했다. 지난 10월 ‘남도영화제 시즌2 광양’은 <서울의 봄>상영 후 토크 콘서트를 펼쳤다. 앞서 4월에 개최된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다시, 민주주의로’라는 이름의 세션을, 8월에 개최된 제2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광장과 현장’이라는 세션을 마련해 구작과 근작을 아우르는 포스트 계엄 담론을 형성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필리핀 민주주의의 불씨><브라질 대선의 기록><마지막 공화당원> 등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겪었거나 겪고 있는” 지구촌 곳곳의 정치적 분쟁에 초점을 맞췄다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핑크 페미>등을 호출해 저항하는 여성의 초상을 재조명했다. 영화제의 특수성 덕분에 극장이 일시적으로나마 광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12·3 비상계엄 실패 1주년과 일정이 맞물린 제30회 인천인권영화제는 광장을 전면에 노출한 두편의 다큐멘터리의 월드프리미어가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광장에서>와 <백개의 광장, 만개할 평등>이 그 주인공이다. 두 작품은 특정 정치인이나 역사적 사건 대신 집회 속 시민들의 면면을 다채롭게 탐구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특히 내란청산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시민 미디어팀의 일원으로서 그간의 정국을 포착해온 여섯 감독의 옴니버스 <우리는 광장에서>는 광장에서의 소외와 성장까지 내밀하게 들려준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당장의 성과에 도취하거나 진영 논리에 입각한 화법이 아닌 “광장을 믿지 못하면서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영화를 귀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광장에서>는 12월6일 제26회 강릉인권영화제에서 두 번째 상영을 마쳤고, 14일 노무현시민센터에서 특별 시사회도 진행했다. 여기에 만족할 수는 없다. 2024년 12월3일로부터 이제 1년이 지났을 뿐이다. 기록과 성찰의 장은 지금보다 넓어져야 한다.
정치인 수기부터 소설가 일기까지… 12·3 이후 서점은
영화보다 빠르고 다양하게, 비상계엄 관련 서적도 쏟아졌다. 헌법과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대중서들이 소소한 인기를 끈 것을 시작으로 빛의 광장을 회고하는 책들이 출간되었다. ‘내란 사태에 맞서고 사유하는 여성들’이라는 부제를 단 에세이 앤솔러지 <다시 만날 세계에서>(안온북스 펴냄), 집회 문화에 새바람을 일으킨 장본인들을 인터뷰한 <케이팝 응원봉 걸스>(클레이하우스 펴냄), 동명의 KBS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된 <12.3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이야기장수 펴냄)처럼 시민 다수의 증언을 한권에 모은 예시들이 대표적이다.
학자, 법조인, 언론인, 활동가 등 50인의 시각을 엮은 <그러므로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사이드웨이 펴냄)처럼 ‘전문가’의 통찰을 보여주는 기획에 이어 비상계엄 이후 이목을 끈 공인들의 산문도 속속 도착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재판장으로 주목받은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의 <호의에 대하여>를 필두로 연말에 이르러서는 우원식 국회의장, 김상욱 의원, 박선원 의원 등 비상계엄 정국을 통과한 정치인들의 수기도 하나둘 세상에 나왔다.
이 밖에도 2024년 12월 “슬픔으로 세상 보기”를 시도한 소설가 황정은의 <작은 일기>, 성인부터 어린이까지 비상계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발휘한 그래픽노블 <앉는 걸 멈추지 마!>등이 사회과학 서적 매대를 넘어 독자와 조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