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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편향과 권위를 관두는 법, 12·3 비상계엄 이후의 다큐멘터리가 가야 할 곳

<한국인을 관두는 법>

초현실적 사건 앞에서 영화는 무릇 당황했고, 민중의 카메라는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12·3 비상계엄은 애초부터 유튜브와 SNS를 통한 숏폼 영상이나 실시간 송출로 이미지화되어 시민에게 각인된 사건이다. 대다수 시민에게 자신이 직접 겪은 일련의 체험인 동시에, 이미 한 차례 미디어를 통해 영상화된 재현의 추체험인 셈이다. 그렇기에 이 사건 이후의 작업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다큐멘터리영화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계엄 사태를 현실과의 시차 없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관객에게 더 이상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 고심 끝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성행한 다큐멘터리의 형식은 아주 간편하고 직관적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를 직시해야 한다는 어려움에서 빠져나와, 사태 전후로 후끈 달아올라 있던 정치인 다큐멘터리의 골자를 택하며 편안한 우회로를 찾은 것이다. 불씨의 시발점은 2024년 이승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국전쟁>이었다. 정치인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다큐멘터리는 <노무현입니다> <노회찬6411> <그대가 조국> <문재인입니다> 등 그전에도 꾸준히 만들어졌다. 다만 <건국전쟁>의 특수한 의미는 관객수 117만명이라는 이례적인 흥행 수치와 더불어 완전한 과거로의 역행에 있었다. 비교적 최근의 정치인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은 그들의 인간성이나 일상을 강조한 뒤에, 그들이 직업적 정치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난의 길을 종합해 곁들이며 현재의 정치적 판도에 은근하게 개입하는 편이었다.

<건국전쟁2>

반면에 <건국전쟁>은 사회에 각인된 역사를 새로 쓰고, 대한민국의 역사적 기반을 리부트하겠다는 과격한 목적을 표명했다. 이승만 정부가 펼쳤던 선진적 교육정책 덕에 시민의식이 향상한 배경이 4·19혁명의 촉매였다는 식으로 과거를 재조립한 것이다. 이는 실존 인물로부터 파생한 특정 진영의 역사적 당위를 봉합하는 기능으로 작동하며 작금 사회의 진영 논리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12·3 비상계엄을 기점으로 극단적으로 심화한 사회적 갈등에 적절히 불을 지피는 땔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길위에 김대중><다시 만날, 조국><건국전쟁2><하보우만의 약속> 등의 정치인 다큐멘터리 역시 제작비를 크라우드펀딩으로 지원받는 방식을 통해 특정 진영의 호오를 처음부터 영화의 정체성으로 말뚝 박아 만들어진 작품들이었다.

정치인 다큐멘터리가 12·3 비상계엄에 대한 당장의 편리한 응답으로 작동한 뒤, 계엄 사태를 더 전문적이고 입체적인 맥락으로 탐구하는 저널리즘 성격의 다큐멘터리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론 <뉴스타파>가 제작한 <압수수색: 내란의 시작>이 있을 것이다. 작품은 <뉴스타파>소속 기자들이 이른바 ‘윤석열 명예훼손 혐의’로 2024년 기소되어 치른 재판의 경과를 중심으로 흐르며, 12·3 비상계엄이 갑작스러운 단일 사건이 아니라 중첩된 광폭의 결과물임을 주장한다. 탐사보도 형태의 시계열적 분석을 가지런히 영상화한 사례로 남았다.

뜨거움 바깥으로

<사랑의 집회>

12·3 비상계엄을 두고 등장한 정치인 다큐멘터리와 탐사보도 형식의 저널리즘 다큐멘터리가 지닌 공통점은 영화가 12·3 비상계엄의 맥락에 있는 직접적 이해관계자들을 일종의 상징처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이다. 출연자의 진영을 명확하게 설정함으로써 이미 영화의 결론이 내려진 다큐멘터리의 닫힌 세계관을 구축했다. 내용과 형식상의 차이가 있더라도 특정 진영의 지지자들이 영화의 방향성에 편안히 맞장구치며 볼 수 있는 편향의 기반만은 유사하게 지니고 있다. 영화의 내용이 사실이든 조작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유튜브 등 알고리즘 기반의 뉴미디어가 만든 필터 버블 현상처럼 수용자가 머릿속에 느낌표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더라도 일정량의 효용 가치를 획득한다. 이것이 정말 온당한 다큐멘터리의 방향성인지 묻는다면, 회의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지금의 다큐멘터리가 동시성을 극대화한 뉴미디어들과 달리 취할 수 있는 독점적 지대란 수용자의 편향에 균열의 자극을 일으키는 물음표의 기능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다큐멘터리가 지니려는 정치적 권위를 포기하는 일부터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간 12·3 비상계엄을 소재로 한 대개의 다큐멘터리는 좌우를 막론하고 계엄 국면에 연루된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광장이나 집회에 나선 이들의 경험을 일종의 권위로 작동시키는 방식을 택해왔다. 광장 내 시민들의 목소리를 취합하는 장면에서조차 인터뷰이의 이름 아래에 특정 단체의 이름을 적어 영화의 내적 논리를 그들의 정체성과 진영 논리에 합치하곤 했다. 다만 12·3 비상계엄을 두고 시민이 구현한 광장은 결코 물리적인 시공간이나 특정 진영의 범주에 한정하는 개념이 아니며, 12·3 이후의 다큐멘터리가 가야 할 곳은 시민들의 깃발과 카메라가 선취한 장소들의 바깥이어야 한다. 계엄의 여파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의외의 장소, 예컨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사랑의 집회>(1964)에서 각지의 마을과 휴양지에 머무는 시민들에게 성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물었듯이 다소 무작위적인 즉흥성이 발발하며 사건의 여파가 의도치 않게 새어나오는 생활의 반경이 스크린에 담겨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대안은 다큐멘터리가 수행할 수 있는 픽션의 가능성을 도모하는 쪽이다. 선례는 멀리 있지 않다. 안건형 감독의 <한국인을 관두는 법>(2018)은 태극기 집회가 일어나는 현대의 풍경 위로 ‘기회주의 반도 총연합 중앙위’라는 가상 인물들의 내레이션을 투입하고, 기회주의라는 중핵으로 한국 정치의 역사를 갈무리하는 페이크다큐멘터리였다. 일제강점기, 군사독재 정권,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대 변화에 따라 권력 획득의 기회를 탐닉하던 이들의 실제 언행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차분히 보여준다. 가상의 집단이란 픽션의 장치로 직관적인 진영 논리를 벗어나고 사회의 정치적 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차가운 태도의 영화였다.

즉 포스트 12·3 다큐멘터리라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특정한 물리적 장소에서 일어난 실시간적 뜨거움을 기록한 결과의 종합이 아니라 바깥 혹은 가상에서 일어나는 차가움과 미지근함을 찾아가는 방법론에 가까워야 할 것이다. 12·3 비상계엄이라는 사건의 중심지에 매몰되어 어쩔 수 없는 편향의 진영 논리를 내포하기보다는, 그 주변으로의 탈출을 통해 다큐멘터리만의 지대를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김경만 감독의 <바보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2007년 겨울철 노란 장판 방에서 대선 개표방송을 보며 술 마시고 시답잖게 장난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비추며, 현실 정치를 아주 미지근한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적이 있다. 12·3 계엄 이후 1년, 다큐멘터리도 이제는 당일의 충격에서 몸을 끌고 나와 사태의 잔향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었는지 살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