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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 도서 -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마르그리트 뒤라스 엮음 백수린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약속이 있어 어떤 도시에 도착한 X의 앞에 펼쳐진 풍경. 거리는 화려하나 건물에 문이 없고 사람도 없어 어디든 들어갈 방법이 없다. 카프카가 떠오르는 이 부조리한 거리를 무작정 걷던 X는 소지품을 모두 잃고, 약속을 어쩌다 했는지 기억해내지도 못한다. 어느 순간 주변을 둘러보니 화려한 집들은 다 사라지고 더럽고 버려진 집밖에 없다. 길을 가는 행렬을 쫓아가지만 아무리 달려도 붙잡을 수가 없고, 결국 어둠에 휩싸인 채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걷게 된다.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의 세계는 아무 이유 없이 내게 적대적이고, 나를 한없이 힘든 상황으로 떠민다. 선 몇개로 구성된 애니메이션처럼 형태를 손쉽게 바꾸면서 새로운 고난을 자꾸 얹어준다.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악몽과도 같은 세계를 헤쳐나가는 경험과도 같은 이야기다. 어느 약국에 온 손님이 풍선처럼 둥근 손을 내밀자, 약사는 톱으로 손을 쓱싹 잘라낸다. 어떤 여자는 벤치에 앉아 있다가 행인들이 타조 머리를 가진 뱀이며 고릴라로 변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렇지만 이 무서운 광경은 작가의 지인이자 책의 엮은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따르면 ‘지어낸 것도 아니고 꿈을 꾼 것도 아닌’ 작가가 살아낸 기록이다. ‘불안’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작가는 말한다. “나는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나의 마음, 나의 영혼, 나의 머릿속 전체를 잠식할 것이다.” 이 불안은 아마도 현실에서 병원 치료를 거쳤을 것이고, 동명의 단편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나’를 침대에 묶어두고 입안에 바늘을 꽂아둔다. 더러운 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팔다리 혹은 머리가 없다.

책의 원제는 ‘Viens’으로 ‘온다, 오라’라는 뜻이다. 제목에 어울리게 다들 어디로 오라는 부름을 받거나, 약속이 있어 어디론가 간다. 그렇지만 목적을 이루지는 못한다. 마천루의 집을 주겠다는 노인의 약속을 받고 그 집에 올라가려고 손수 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힘들게 만들었는데, 막상 완성하여 사다리를 오르자 노인이 아래에서 사다리를 마구 흔들어댄다. 알 수 없는 적의와 비열함 속에서 나는 단언한다. “나는 절대 그곳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산타로사에서 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한 여자는 강박적으로 공항에 전화를 걸어대고, 가야 할 길을 몇번이고 걸어보고, 옷을 사 입으려고 가게에도 간다. 그렇지만 결론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쳐야만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적의 명령’ 때문에 원고를 찢어야 했다는 작가의 설명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도사린 무수한 불안을 생각한다.

이 적대적이고 불친절한 도시를 끝없이 미끄러지듯 떠돌다 보니 내 영혼은 점점 슬픔에 잠긴다. 70쪽

내 안에는 희미하고, 그렇다, 아주 막연하고 어쩌면 미친 것 같기도 하지만, 언젠가 하늘과 땅 사이 어딘가에서 마침내 쉬게 되리라는 희망이 남아 있다. 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