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씨네21 추천도서 - <인간이라는 환상처럼>

하재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앙드레 브르통이 쓰고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옮긴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가져온 ‘소량 현실’이라는, 거창한 듯 소박한 듯한 제목을 가진 시를 읽는다. 아름다움은 폐허와 자주 혼동되고, 모조 지구에서는 여름에 폭설이 내리는데, 우주에서 날아오르기 위해 새들은 없는 날개를 꺼내야 한다. 앙드레 브르통은 죽었고 황현산도 죽었고 초현실주의는 현실에 발 딛고 있어서, “우리가 듣는 음악은/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거야/ 네가 지금 보는 풍경이/ 너의 오랜 후년에 떠오르듯이”라는 시의 도입부를 이해할 것 같다는 착시로 이끈다. 없는데, 있습니다. 가능한데,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시가 작동하는 방식.

하재연의 네 번째 시집 <인간이라는 환상처럼>이 출간되었다.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으로 데뷔하고 2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하재연은 시집 <라디오 데이즈><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우주적인 안녕>을 펴냈는데 시집 발표 연도가 비슷한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 <라디오 데이즈>에서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까지 6년,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부터 <우주적인 안녕>까지 7년, 다시 <우주적인 안녕>에서 <인간이라는 환상처럼>까지 7년이 걸렸다. 꾸준하고 성실한 이 간격은 라디오 주파수에서 바닷가로, 우주로, 그리고 되돌아 인간으로 천천히 탐색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시간이기도 한 듯하다. 하지만 늘 시집의 제목이 그러하듯이 제목은 시집의 극히 일부여서 그 모든 단어들은 그의 모든 시집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평대 해변>의 이런 전개처럼. “사람에게/ 일생 동안 꺼내 쓸 말의 단지 같은 것이 있다면/ 나는 몇 번이나 얕은 바닥을 깨뜨리고 엉엉 우는 아이처럼 마음 아파했을 텐데/ 그리고 내 눈물을/ 포말로 부서뜨리는 너의 가벼운 웃음.” 구름 사이로 순간의 빛이 내리쬐는 장면을 포착하는 일은 포말이 되어 부서지는 가벼운 웃음을 기억하는 일. 처음 만나는 어둠 속에서만 서로가 지닌 고유의 파장이 지닌 색깔을 알아볼 수 있다면 (<빛을 등지고 올라가는 계단>), 옥상 낭독회에 드리운 어둠은 빛이라고 불러 마땅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두런두런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흘러오고 어딘가로 향하는 느낌 속에서 시집 <인간이라는 환상처럼>을 읽어가다 보면, 그 안에서 질문은 답하지 않아도 좋은 언어로 고스란히 간직된다. 기억할 만한 순간들의 모음이자 기억되어야 할 얼굴들의 집합과도 같은 시집.

미래의 네가/ 다른 미래에서/ 전송된 나의 빛을 읽어 내려갈 때/ 행간에 접힌 얕고 깊은 숨소리들을/ 펼칠 때 /66쪽, <빛을 등지고 올라가는 계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