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이>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호메로스의 원전 <오디세이아>와의 비교다. 인류 문명사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어떻게, 왜 각색했는지에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다. 일례로 영국의 고전학자이자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영어권에서 최초로 완역한 에밀리 윌슨은 오디세우스의 복잡한 성정을 평면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비롯한 서양고전 분야에서 가장 정통한 이, 강대진 서양고전학자의 의견은 어떨까. 그는 <신화와 영화> <그리스 로마 서사시>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와 <오디세이> 개봉에 맞춰 개정 출간한 신간 <영웅의 귀환 오뒷세이아> 등의 저서, 다양한 연구·방송 활동을 통해 서양고전을 국내에 해설 중이다. 그는 “서양고전이 널리 소개되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소식”이라며 <오디세이>의 면면을 긍정적으로 풀이해주었다. <오디세이>의 맥락을 더 풍부하게 보고 싶은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오디세이아>의 신들은 왜 사라졌나?
<오디세이>에는 그리스 신들이 자주 언급되지만, 신들이 직접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테네(젠데이아)가 종종 오디세우스(맷 데이먼) 앞에 모습을 비추는 정도다. 작중 초반의 나그네 멘테스, 텔레마코스를 돕는 전사 멘토르 모두 원작에서는 변신한 아테네였으나 영화에는 인간으로 등장한다. <오디세이아>는 <일리아스>에 비해서도 신들의 이야기가 적은 편이었지만, 영화 <오디세이>는 그들의 존재감을 더 줄였다.
이에 강대진 서양고전학자는 “아테네조차 실재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오디세우스의 내면이 바깥으로 외부화된 것 아닌지라는 생각까지 든다. 원작에서는 특히 앞부분 텔레마코스의 여행과 마지막 오디세우스의 귀향 부분에서 아테네의 역할이 큰데, 그 기능이 대부분 인간의 몫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결단과 책임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라 해석했다. 덧붙여 “현대의 감성에 맞게 각색한 결과이며 안드레이 콘찰롭스키의 <오딧세이>(1997)처럼 신들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다.
하여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쪽보다 그리스 비극의 형태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반신에 가까운 오디세우스의 영웅담이 아니라, 오디세우스가 보통의 인간으로서 큰 비통에 빠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쓸모없음을 회의하고, 동료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음을 느낀다는 점이 원래 호메로스 시대 서사시에는 거의 없는 사고방식이다. 그 이후 에우리피데스(기원전 5세기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메데이아> <이온> 등을 써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로 꼽히는 인물.-편집자)의 비극에 가야지 드러나는 가치관이다. 지금 보아도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무척 현대적인 발상으로 가득한데, 놀런 감독이 그런 모티프를 영화에 투영했다.”(강대진)
무엇이 왜 빠지고 더해졌나?
<오디세이>가 가장 적극적으로 각색하여 빠트린 원전의 대목은 오디세우스와 나우시카아(6~8권에 등장하며, 표류한 오디세우스를 구한 스케리아섬 파이아케스족의 공주.-편집자)의 이야기다. “원래 나우시카아는 오디세우스의 지난 10년 모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이다. 이것을 영화에서는 칼립소가 맡게 됐다. 또 나우시카아네 왕국이 굉장히 이상적인 도시이고 ‘좋은 저승’(강대진 서양고전학자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오디세우스의 환상적인 모험담을 일종의 ‘저승 여행’이자 죽음의 예행 연습으로 간주해왔다.-편집자)의 역할을 한다. 또 하나의 좋은 저승인 아이올로스의 섬 이야기도 빠졌다. 이로써 <오디세이>에는 나쁜 저승만 남아 <오디세이아>보다 상당히 비관적인 작품이 됐다.”(강대진)
원래 오디세우스의 모험은 트로이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질서 이후,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하는 이의 견학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지 이곳저곳 다니며 경험해야 하는데, 그 이상적 사회 질서에 관한 탐구 과정이 빠지게 됐다. 역시나 더 <오디세이>가 비관적으로 보이는 이유”(강대진)다. 저승에서 오디세우스가 어머니를 만나는 이야기도 빠졌는데, 이것을 강대진 교수는 “미국적인 특성, 핵가족화된 당대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오디세이아>의 첫 구절은 ‘그 남자에 대하여 내게 말씀해주소서. 무사 여신이시여’다. 이것은 오디세우스의 현재를 포함해 어릴 적 외가에 갔다가 흉터를 얻은 과거, 아버지 라에르테스로 미루어보는 오디세우스의 미래를 모두 포괄하는 ‘그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뜻이다. 다만 <오디세이>는 흉터를 얻은 것도 중년쯤으로 설정했고, 라에르테스의 존재를 뺐다. 즉 한 남자의 생애를 통째로 다루기보단 중년 남성의 서사에 집중한 것”(강대진)이다.
<오디세이>에는 오디세우스가 계속하여 미래의 ‘암흑시대’를 예견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원전에는 없던 내용이다. <오디세이>의 비관성을 더 키우기도 하는 이 ‘암흑시대’의 원류는 무엇일까. “청동기시대의 마지막 불꽃인 트로이전쟁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 이후 바다에서 나타난 어느 민족이 그리스와 이집트 등을 공격하여 기존의 문명 근거지를 대체하고 약 400년 동안 인류의 암흑기가 시작되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 역사적 사실이 정확히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영화에 대략적으로 녹여낸 듯하다.”(강대진)
<오디세이>의 수미상관을 책임진 트래비스 스콧의 역할은 ‘랍소도스’(Rhapsodos)로 보인다. “랍소도스는 그리스어로 노래를 꿰매는 자라는 뜻이며, 그 어원은 지팡이 ‘라브도스’에서 온 것으로 본다. 호메로스 이후 여기저기에 호메로스의 시를 낭송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는 랩소디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하다. 지팡이로 탕탕탕 박자를 맞추며 시를 음송한 이들인데, 이러한 역할을 작중에 추가”(강대진)했다.
<오디세이>의 칼립소는 무사 여신의 역할까지 도맡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 무사 여신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워주는 동시에 영웅들의 영광을 영원히 전해준다. 이 망각과 기억이 무사 여신의 의미다. 영화에서 칼립소도 오디세우스에게 로토스를 먹이면서 과거를 잊게 하는 동시에, 해변에서 뗏목 조각을 모으는 오디세우스를 막지 않는다. 옛날부터 방랑 가객이 노래하는 것을 배의 항해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놀런 감독의 분명한 의도인 것 같다.”(강대진) 무사 여신의 노래를 칼립소와 오디세우스의 항해로 갈음한 셈이다.
고증 차원에서 강대진 서양고전학자가 다소간의 아쉬움을 표한 대목은 트로이 목마와 시논(엘리엇 페이지)이 함께 있던 초반부의 해변 오프닝 시퀀스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는 사람이 말등에 타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추가한 것이겠지만, 평소에도 주시하던 부분이다 보니 바로 눈에 띄었다!”(강대진) 본래 창이 주된 무기인 시대였지만, 오디세우스와 인물들이 검을 주로 활용하는 것도 다소 편의적으로 각색된 부분이다.
<일리아스>와의 관계는?
<오디세이아>와 <일리아스>를 따로 얘기할 순 없다. 호메로스의 작품인 동시에, 세계관과 이야기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꽤 다른 스타일을 지닌다. 어쩌면 <오디세이>의 정수는 <오디세이아>보다 <일리아스>에 더 깊게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일리아스>에서 유일하게 변화하는 인물은 아킬레우스다. 절친한 친구의 사망과 전쟁의 경과를 보며 전쟁의 필요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아킬레우스의 모습이 <오디세이> 속 오디세우스에 녹아들었단 해석도 가능하다.
본래 <일리아스>는 <오디세이아>보다 더욱더 비관적인 세계다. “<일리아스>에서 프리아모스가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받으러 갔을 때 아킬레우스는 ‘제우스의 궁에는 두개의 항아리가 있는데, 한쪽에는 늘 좋은 것이, 한쪽에는 늘 나쁜 것이 있다. 인간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줄 때도 늘 나쁜 것을 섞어서 준다’라고 언급한다. 즉 인간에게 닥치는 불행이 다소간 무작위적이고 불가피한 일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오디세이아>는 조금 더 낙관적이다. <오디세이아>를 해석하는 두개의 큰 갈래 중 하나는 오디세우스의 당당한 성장소설로 보는 것이다. 하나는 오디세우스가 늘 죽음 가까이(저승 여행)에 갔다가 살아 돌아오므로, 다소 헛된 희망이라도 불러일으킨다고 보는 쪽이다.” 즉 <오디세이>가 택한 비관의 세계를 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오디세이아>의 토대와 낙관은 물론이거니와 <일리아스>의 요소와 비관까지 파악해야 좋다는 이야기다!
결말은 단테의 <신곡>과도 연결된다?
<오디세이>는 <오디세이아>와 살짝 다른 결말을 택한다. 페넬로페와 함께 서쪽 먼 곳으로 떠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치 그곳에 가 동료들을 애도하고 다시 이타카로 돌아오진 않을 것만 같이 떠나가는 것”(강대진)이다. 이 결말은 신기하게도 단테의 <신곡>과 연결된다. “<신곡>의 지옥편 26곡을 보면 단테가 오디세우스와 만난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중해 연안을 구경한 이후, 대서양 남서쪽으로 한없이 가다가 풍랑을 만나 죽은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인간이란 그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높은 덕과 지식을 쌓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아마 이 대목을 <오디세이>에 녹여낸 것이 아닌지 싶다.”
오디세우스가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는 모티프도 <율리시스>(1954)에서 선행된 것이다. 강대진 서양고전학자는 “본디 고전이란 복리 효과 같은 것을 지닌다. 앞사람들이 변형한 것을 그다음 사람이 변형하고, 또 변형하며 여러 의미를 중첩하게 되는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놀런의 현대적 각색도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