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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일순간의 희망을 보기 위해 -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 리뷰

일본 내 가상의 니우라시, 어디가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개조된 집엔 330년간 전통을 이어온 불꽃의 장인 오비나타가 있다. 다만 그의 집이자 불꽃 공장인 이곳은 곧 철거될 예정이다. 시의 재개발과 태양광 패널 설치를 위해서다. 오비나타의 아들 케이타로는 이 장대한 유산의 소실에 격하게 반대하고, 형 센타로는 시류를 받아들여 니우라시의 공무원이 되고자 한다. 형제와 어릴 적부터 남매처럼 지낸 카오루는 이 사태에서 벗어나 도쿄로 향한다. 오비나타는 어딘가로 사라지고, 니우라시에 계승되어온 불꽃놀이의 전통은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게 된다.

각자의 길로 흩어진 세 사람은 4년 만에 재회한다. 도쿄에서 미디어아트를 전공 중인 카오루에게 센타로가 찾아온다. 철거를 앞둔 집을 배경으로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해온 것이다. 잠시 귀향한 카오루는 여전히 집을 지키며 바깥에 나오지 않는 케이타로를 마주한다. 케이타로는 전설로만 전술되어온 불꽃 ‘슈하리’를 완성하여 쏘는 것이 이 집과 공장을 지켜낼 마지막 수단이라 여기고 있다. 슈하리에 필요한 것은 ‘파리스 그린’(화록청) 색의 안료다. 독성물질인 비소를 머금고 있어 이제 쓰이지 않는 재료다. 사라진 색, 사라질 집, 사라질 수도 있는 꿈들 사이에서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는 슈하리의 불꽃을 포기하지 않는다.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를 말하며 이것의 작풍을 묘사하지 않을 순 없다.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부드러운 선들, 온갖 빛과 색이 겹치고 서로를 투영하는 환상적인 분위기의 빛깔, 동시에 인물의 동세를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이어가며 리얼리즘의 미학을 잃지 않는 프레임의 연결은 직접 보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지의 이미지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작중의 누구도 ‘슈하리’를 직접 목격하지 못한 것처럼,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의 모든 컷 하나하나 역시 우리가 지금껏 감상하지 못한 새로움의 범주에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호스에서 뿌려지는 물줄기의 빛 반사마저 새롭다. 일본 화가 출신인 시노미야 요시토시 감독은 이 모든 이미지의 대부분을 수작업으로 만들며 멀티플레인 카메라 등의 아날로그 기법을 쓰되, 스톱모션애니메이션과 실사 이미지를 결합해가며 작품의 내부를 채운다.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은 이러한 이미지의 매혹으로 관객의 눈을 단숨에 이끌지만, 그 배면에 놓인 서사의 흥미로움 역시 놓치지 않는다.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많은 일본영화와 애니메이션이 각자의 자리에서 상실 이후의 치유 방식을 그리고 있다. 하마구치 류 스케, 신카이 마코토 등 창작자들은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가리지 않고 거대한 무언가가 무너진 이후 어떻게 다시 일상을 살아갈 것인지의 주제를 논하는 중이다. 이 논제에 대한 시노미야 요시토시 감독의 답변에 주목할 법하다.

그는 비상한 구원을 그리지 않는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너의 이름은.> 같은 기적적 이고 초현실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청춘들이 만나고 그들의 관계가 즉각 세계의 운명을 뒤바꾼다는, 이른바 ‘세카이계’(セカイ系, 소년과 소녀의 만남이 세계의 운명과 직결되는 서사 유형. 마찬가지로 <너의 이름은.>이 대표적-편집자.)풍의 작법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제시되는 희망이란 일순간 피어났다가 금세 사라져버리고 마는 불꽃놀이의 화학작용처럼 아주 잠시간 우리의 눈에 보일 뿐이다. 그 순간을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지가 문제다. 불꽃을 단순히 한번의 유흥으로 즐길 것인지 혹은 불꽃의 양태에서 우주 만상의 원리를 파악하여 새로운 단계의 세계로 발을 디딜 것인지는 온전히 보는 이들의 몫이다. 그렇게 <파리스 그린이 밝는 날에>는 세상의 개변이라는 이상적 책임을 관객에게 나눈다. 환상의 불꽃을 통해,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껏 접하지 못한 색과 빛의 형상을 통해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지평에 맞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