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진은 자신을 배우라 부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연기자의 길에 들어서기로 했고, 91학번으로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에 진학했지만, 배우라는 호칭을 기꺼워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학 시절 받은 “문화충격”이 오랜 영향을 미쳤다.
“한 학번 위에는 황정민 배우가, 동기로는 코미디언 송은이가 있었다. 장항준 감독, 장진 감독과도 동시기에 학교를 다녔다. 전국에서 날고 기는 쟁쟁한 분들 틈에서 쪼그라들었다. 내 자리는 여기에 있지 않은 것 같았달까. 친구를 따라 개그 동아리에서도 활동했는데, ‘너처럼 못 웃기는 애는 처음 봤다’는 소리도 들었다. 개그맨의 자질은 없었고 연기에도 집중 하지 못했지만, 동아리 덕에 콩트 짜는 기술이 생겨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다. 예능작가 생활을 했고, 코믹한 광고도 연출했다. 소극적인 성격이라 작가나 연출 말고 연기를 시켜달라는 말은 못했다. 그저 옆에서 누가 연기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러다 우연한, 결국엔 운명이 된 만남이 갈증을 일깨웠다. 고등학생 때 연기학원을 함께 다닌 사이이자 대학 동문인 친구를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마주친 날이었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다는 친구는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너는 지금도 연기하지?” 아니라고 답하자 의아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제야 생각했다. ‘저 친구는 나를 배우로 보고 있었는데, 나만 나를 배우로 인정하지 않았구나.’ 이상하게 용기가 생겼다. 다시 오디션을 보며 기회를 찾아 나섰다. 마흔을 앞두고 어릴 적 꿈을 다시 꾸게 해준 친구와는 부부의 연까지 맺었다.
“아내에게 내가 언젠가 세상을 떠나면 비석에 ‘배우 한우진’이라 새겨달라고 했다. 그약속 덕분에 오히려 연기를 대하는 마음이 편해졌다. 예전에는 연기를 하면 스타가 돼야 한다고, 내로라하는 선배들처럼 돼야 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연기하는 사람’으로 남으면 된다고 여기니 어떤 배역을 맡든 좋을 것 같았다.”
아동용 애니메이션 각본을 집필해달라고 제안받은 다음, 모션캡처에 그림을 덧입혀 제작하겠다는 감독에게 모션캡처 연기도 하겠 다고 나선 건 그래서다. 그렇게 <신비로운 산삼골의 마법여행 이야기> 대본을 쓰고, 1인7역을 해냈다. 온몸으로 어린이, 할머니, 산신령, 동물들을 형상화하며 성별과 연령, 종을 넘나드는 재미를 느꼈다. “아이들이 보는 작품이니까 쉽게 접근하려 했는데, 아이들이 보기에더 섬세한 연구가 필요했다. 내 얼굴이 드러나지 않으니 더 자유롭게 그 과정을 즐겼다.”
소문을 듣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크리에이티브 섬’의 조혜승 대표가 찾아왔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이하 <구살돼지>)의 공동제작자인 그는 전통적인 셀애니메이션을 고집해서는 작품을 완성하기 힘들다는 판단 끝에 모션캡처를 시도하기로 해, 한우진 배우가 촬영 중인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마침 그 자리에 동행한 한우진 배우의 아내는 “내가 한우진 배우의 매니저이기도 하다”며 조혜승 대표에게 명함을 건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신이 왔다. <구살돼지>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연락이었다. 허범욱 감독과도 그렇게 만났 다. 성인용 장편애니메이션에 합류한다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5개월간 8회차를 촬영하기로 했다. 그게 2021년 말의 일이다.
“나는 신이 났는데, 허범욱 감독은 겁을 냈다. 평생 셀과 그래픽으로 애니메이션을 해온 그가 사람에게, 그것도 주류 미디어에서 검증되지 않은 배우에게 디렉션을 주고 모션캡처를 한다니 얼마나 불안했겠나. 그러나 말수가 적은 그는 내색을 잘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는 읽어봤냐고 묻더니, 내가 30역에 달하는 모든 역할을 맡아줘야 한다는 얘기로 말문을 열었을 뿐이다. 당황했다기보다는 그동안 쌓아온 한을 이렇게 다 푸는구나 싶더라. 이게 웬 떡이냐!”
속으로 흥분을 삼킨 한우진 배우에게 허범욱 감독은 1인30역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 영화 속 캐릭터들은 전부 연결돼 있다”는 메시지였다. “멋진 말로 포장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30역으로 분하는 동안 진짜로 그 속뜻을 이해했다. 한우진 배우는 사람의 몸짓, 동물의 표정, 괴물의 눈빛을 소화하며 직감했다고 한다. “뭘 자꾸 준비하려고 해서는 안되겠다. 현장에서 감독의 요구를 흡수하려면 나를 비워야겠다.” 이는 정확한 콘티를 토대로 작업할뿐 아니라 배우와 배역의 감정선을 고려해 촬영 순서를 짜는 등 “부드러운 독종”의 면모를 뽐낸 허범욱 감독을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다만 ‘5개월간 8회차’ 계약으로는 턱도 없었다. “모사나 마임이 아닌” 모션캡처이기에, 신체를 두루 활용한 연기를 담기 위해서는 팔다리와 얼굴을 각각 분리해 찍어야만 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못하는 성품”을 가진 허범욱 감독이 직접 모션캡처용 슈트를 입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한우진 배우는 결단했다. “끝장을 봅시다!” 감독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며 만류했지만, 배우는 이렇게 응수했다. “돈 안 받고는 못합니다. 나도 프로 배우 입니다. 감독님도 떳떳하게 작품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촬영할 때마다 점심으로 짬뽕을 사세요!” 그날부로두 사람은 3년간 짬뽕을 먹었다. 셀 수 없이 먹었다. “그것으로 몇억원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생각한다.”
식사 전후로는 수많은 스튜디오를 전전하며 촬영을 이어갔다. 한우진 배우의 친구가 운영하는 스튜디오를 빌리기도 했다. 감독, 배우,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섬 소속의 김민주 오퍼레이터까지 세 사람만 모이면 작업할 수있었다. 한우진 배우는 그 결과물이 못내 궁금 했지만, 허범욱 감독은 “안시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차분한 감독의 드문 허풍인 줄만 알았는데, 현실이 되었다. <구살돼지>가 2024년 제48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미드나이트 스페셜 섹션에 초청받은 것이다.
“첫 상영날 장맛비에 가까운 소나기가 내렸다. 그런데도 객석이 다 찼더라. 그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받았는데, 우리를 안내해 주는 영화제 관계자가 배우로서 이 레드카펫을 밟은 건 내가 두 번째라고 하더라. 믿기 어렵다고 하니, 목소리 출연한 배우들이 아닌 모션캡처로 참여한 배우는 앤디 서키스 이후 내가 두 번째가 맞다고 했다. 소름이 돋았다. 모션캡처를 시작한 뒤로 앤디 서키스 같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허범욱 감독이 그 꿈을 실현하게 해줬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는 한우진 배우에게는 아내의 감상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영화 속 인물들에 게서 내가 보인다고 하더라. 아무리 모션캡처 후 보정을 거친다고는 해도 내 골격을 아는 사람은 내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앉는 자세, 틀어진 걸음걸이처럼 숨길 수 없는 나의 본질이라는 게 있으니까.” 이제 한우진 배우는 그런 인간성이 반영된 기술을 포용하는 연기를 지향한다. 수년간 모션캡처 발전사를 몸소 체험하며 그 가능성을 익혔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연기의 정수에 다가가는 것이 모션캡처의 매력 이라고도 믿는다.
“허범욱 감독도 <구살돼지>를 통해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경계를 깊이 고민했고, 모션캡처라는 새로운 도전을 수용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냈다. 그는 그 방법을 후배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인 만큼, 아카데미 일이라면 발벗고 부산까지 달려가곤 했다. 그 진심이 애니메이션 감독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면서, 나 또한 그를 기억하며 계속 배우로 살아가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