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가타기리 앞에 거대한 개구리한 마리가 나타나서는 믿을 수 없는 말을 건넨 다. “절 보고 놀라셨겠죠. 난 도쿄를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 왔어요. 엄청나게 큰 지진입니다.” 그러고서는 기묘한 제안 하나를 덩그러니 던진 다. 은행 지하로 가서 지렁이 군을 상대로 싸우 자고. 그의 분노가 지진의 근원이라고. 다소 황당한 상황이지만 더 황당한 건 가타기리는 개구리의 존재를 의심하기는커녕 그의 말을 경청 한다. 피에르 폴데스 감독의 장편애니메이션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는 이처럼 현실의 질서에 불쑥 끼어든 기이한 사건들을 아무 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러 단편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도쿄를 배경으로 한다. 아내가 갑자기 집을 떠난 고무라는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평범한 은행원 가타기리는 정체를알 수 없는 개구리와 마주한다.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이들은 저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상실과 불안을 품고 있다.
무라카미의 소설에서 환상은 현실의 반대편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감정의 틈을 벌린다. 사람들은 출근하고,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지만 그 익숙한 풍경 아래에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이 잠복해 있다. 거대한 개구리나 기묘한 꿈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언어인 셈이다. 문제는 문학에서 독자의 상상에 맡겨 졌던 존재를 영화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보여주 어야 한다는 데 있다. 보이지 않기에 가능했던 모호함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사라질 수도 있다.
폴데스는 이 난제를 애니메이션의 조형적 자유로 풀어낸다. 실사영화에서 거대한 개구리는 현실적인 인간과 구별되는 특수한 존재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인간도 개구리도 같은 선과 색으로 만들어진 다. 도쿄의 사무실과 거리, 사람의 얼굴과 환상속 존재가 동일한 이미지의 질서 안에 놓이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려진다. 피에르 폴데스 감독은 실제 배우들의 연기를 촬영한뒤 몸짓과 표정을 바탕으로 인물들을 새롭게 그려냈다. 현실의 움직임을 빌려오되 그 외형은 현실에 종속시키지 않은 것이다. 덕분에 인물들은 낯익으면서도 어딘가 낯설다. 이 미묘한 거리감은 무라카미 문학 특유의 정서와 맞닿는다. 무엇보다 영화는 개구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그 존재의 의미를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다. 형상은 선명해졌지만 해석의 여지는 여전히 열려 있다.
서로 다른 단편을 하나의 영화로 연결한 방식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인물들을 묶는 것은 사건의 뚜렷한 인과관계가 아니라 재난 이후의 사회를 떠도는 상실감이다. 지진은 결코 건물과 도로만 흔들지 않는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일상, 지속될 것이라 여겼던 관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까지 거대한 파도처럼 모든 것을 뒤흔든다. 폴데스는 이러한 균열을 거창한 재난의 이미지보다 개인의 침묵과 기묘한 만남 속에서 발견한다. 사회 전체를 뒤흔든 충격이 각자의 내면에 서로 다른 모양으로 남는 것이다. 따라서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가 보여주는 것은 환상을 사실처럼 만드는 (현대적이고 능숙한) 기술이 아니라, 말로 설명 하기 어려운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면서도 그것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태도’다. 우리는 화면속 개구리를 분명히 보았지만,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끝내 설명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 그 여백 속에서 무라카미의 문학은 또 다른 생명력을 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