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그대로 구제역(口蹄疫)은 짐승의 입과 발을 타고 퍼지는 전염병을 뜻한다. 영어 로도 ‘foot-and-mouth disease’라고 불린 다. 무언가를 먹기 위해 쓰는 입. 어딘가로 가기 위해 쓰는 발. 생활양식을 드러내는 부위가 감염을 매개하는 것이 가축만의 일은 아니다. 우리도 타액을 나누다 바이러스를 교환하고, 이동을 거치며 병을 옮긴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이하 <구살돼지>)는 그 교집합에 드리운 음영을 째려본다. 동물과 사람, 나아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괴물로 분류되는 생명을 아우른다. 도리어 ‘인간성’을 되묻는 이영화는 환자의 입이 고통을 말하게, 상처 난 발이 목적지로 향하게 돕기 위해 반인반수의 크리처들을 배태한다.
허범욱 감독이 들려주는 그 탄생 설화의 도입부는 매우 익숙해서 섬뜩하다. 언제 다시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비극들이라서 그렇다. 첫 번째 설화는 돼지 농장에서 시작한다. 신종 구제역으로 살처분을 면치 못한 돼지가 100만 마리에 달한 어느 날, 깊은 구덩이에 갇힌 돼지 H(남도형)가 함께 묻힌 동족들 사이로한 줄기 빛을 본다. 가까스로 땅 밑을 박차고 산속으로 도피한 H는 동굴 안에서 눈물을 훔치다 잠든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어쩐 일인지 직립보행이 가능해졌음을 알게 된 H는 물가에 비친 몰골을 보고 소스라친다. 돼지의 얼굴, 남성의 인체를 가진 괴물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 오래도록 사람이 되고 싶어 한 H는 뛸 듯이 기뻐한다.
같은 시각, 두 번째 설화가 쓰인다. 초등학생 때부터 따돌림을 당하며 ‘돼지’라 놀림 받던 정석(남도형)은 군대에서도 가혹행위의 희생양이 된다. 더 이상 폭력을 견딜 수 없던 그는 우발적으로 선임을 살해한 뒤 탈영한다. 앞서 괴물이 된 H가 밟고 지나간 물웅덩이에서 목을 축인 탓일까. 머지않아 정석도 기이한 증상을 겪는다. 전신에 붉은 반점이 돋더니 단숨에 굵고 억센 털이 자라난 것이다. 전설 속 빅풋의 형상에 가까워진 그 또한 갑작스러운 변화에 은근히 만족한다. 한결 커진 골격과 굵어진 음성 덕에 누구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리라고 느낀 셈이다.
영웅은 어디에도 없다
남도형 성우가 H와 정석, 그리고 그들이 변모한 크리처의 목소리까지 소화했다. 또한명의 배우 한우진이 30역에 달하는 전체 등 장인물의 모션캡처 연기를 담당했다. 그러한 선택을 비롯해 데칼코마니를 염두에 둔 포스터속 이미지가 암시하듯 H와 정석은 사실상 한캐릭터의 양면과 같은 존재들이다. 한쪽은 인간에서 짐승을 닮은 형태가 되었고, 한쪽은 짐승에서 인간을 닮은 형태가 되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서로 다를지언정 이 역설적인 진화의 배경은 상통한다. 타인에게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처지를 청산하는 것. 인간이 라면 차라리 짐승이 되어, 짐승이라면 기어코 인간이 되어 자유를 누리겠다는 절규가 <구살 돼지>의 동력이다.
H와 정석의 과거가 흑백 무성영화처럼 교차하는 대목은 고전적인 향취를 발산한 다. 영웅서사 12단계의 1막을 착실히 밟는 듯한 전개도 신화적인 재미를 충족한다. 그러나 <구살돼지>는 2막에서까지 낯익은 성장기를 펼칠 생각이 없다. H와 정석이 새로운 가죽을 입고 맺은 관계들은 대안적인 공동체로 발전하 지만, 이내 한계를 보인다. 허범욱 감독은 이기 심, 질투심, 허영심과 같은 감정을 끌어들여 H가 일군 동물 사회의 파탄을 그리는 데에 집중한 듯하나 일대일로 이뤄진 정석과 지은(김도희) 사이를 들어 그 반례를 살피는 데도 신경 쓴다.
지은은 정석보다 작고 어리다. 여성 청소년으로 묘사되는 그는 모종의 이유로 가출했 다. 죽음을 꿈꾸며 들어선 산에서 정석을 만났 고, 정석의 외형을 개의치 않고 대화를 지속했 다. H의 동료들이 리얼리티에 충실했던 것과 달리 정석에게 다가온 지은은 어쩌면 너무 이상적이라 판타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이른 퇴장이 더 쓰라리다. 지은의 목숨이 다하면서 정석이 인간적으로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바스라진다. 세상을 향한 분노로 엮인 관계란 얼마나 취약한지도 밝혀진다. 그 교감이 진실되었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구살 돼지>는 어디에도 영웅은 없다고 울부짖는 동시에 울부짖기만 해서는 영웅이 자랄 수 없다고 역설한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처럼
허범욱 감독은 국내 장편애니메이션 최초로 모션캡처 기술과 3D 블렌더 툴을 도입해 2D애니메이션 특유의 질감을 살렸다. 모션 캡처 데이터를 그대로 활용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프레임을 걷어내고, 소스를 수정하면서 <구살돼지>만의 그로테스크한 감각을 배가했다. 실사로 얻은 움직임이 강렬한 작화에 스며들어 현실감을 높이고, 상상력을 보존한 결과다. 한우진 배우는 허범욱 감독이 이러한 도전에 따른 어려움을 여럿 겪었다고 증언했다. 장르의 경계를 자문하며 자신만의 연출 미학을 정립하는 여정도, 애니메이션으로서 제작 지원을 받기 위해 주변을 설득하는 과정도 지난했다고 한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장편애니메이션 제작연구과정 5기를 통해 첫 장편 <창백한 얼굴들>(2014)을 선보인 뒤 2024년 제 48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두 번째 장편 <구살돼지>를 공개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허범욱 감독은 <구살돼지>와 함께 35개 영화제를 순회했고, 일본 개봉까지 지켜봤으나 지난 7월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차기작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사라졌지만, 그를 기억하는 방법은 계속해서 발명할 수 있다. 당장은 <구살돼지>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본다. 영화 말미, 정석은 지은이 남긴 글과 책 한권을 읽는다. 거기에는 실비아 플라스의 시 <아빠>가 영문과 국문으로 병기돼 있다. 난해하지만 힘 있는 문체는 허범욱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깃든 슬픈 박력을 연상시킨다. 마침 허범욱 감독은 시인을 꿈꾼 문학 소년이었다고도 한다. 그의 영면에 기도를 바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