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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오늘날 영화잡지 편집자로 산다는 것 - <사이트 앤드 사운드> 편집팀장 이저벨 스티븐스의 에세이

제8회 <사이트 앤드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특집이 실린 2022년 12월호.

“나는 납치당하고 싶다”, 작가 수전 손택이 2000년 <뉴요커>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영화가 자신의 의식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강제로 낚아채주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손택에게 영화관이란 자신을 내맡기는 곳, 그녀가 4년 전 에세이 <영화의 쇠퇴>(The Decay of Cinema)에서 썼듯 “이미지의 물리적 현존에 압도되는” 곳이었다.그 에세이에서 손택은 집에서 TV로 영화를 보는 빈약한 경험을 개탄했다. 오늘날 온라인으로 영화를 보고 영화에 관한 글을 읽는 것에 대해 그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인터넷은 분명 우리를 현재로부터 휩쓸어간다. 나 자신을 포함해 손바닥에 꽉 쥔 기기 위로 몸을 구부린 채 거리를 몽유병자처럼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증거다. 그러나 인터넷은 우리를 황홀하게 납치하는가? 손택이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우뚝 다가서는 거대한 스크린의 장관에 대해 말했듯, 인터넷은 “우리의 온전한 주의를 요구”하는가? 온라인에서 우리는 스와이프하거나 스크롤하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우리의 주의력은 반쯤 읽은 기사에서 장보기로, 소셜미디어 댓글로, 이메일 뉴스레터로, 또 그다음으로 질주해간다.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압도되지만- 인터넷의 헤드라이트 앞에 선 사슴처럼- 결코 납치되어 한곳에 오래 붙잡혀 있지는 못한다.

나는 영화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에서 여러 직책을 거치며 거의 20년간 일해왔다. 내가 잡지에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일부 필자들은 여전히 기사를 팩스로 보내왔다. 그걸 힘겹게 타이핑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이들은 이메일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원고를 플로피디스크에 담아서 가져오기도 했다. 이제 사무실에 팩스기는 없다. 디스크 드라이브도 없다. 영화 문화에 진지하고 상상력 넘치게 관여하는 월간지의 사명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이 변했지만, 나는 영화잡지가 옹호해야 할 것은 그리고 잡지 스스로도 가능한 한 모방해야 할 것은 어둠 속에서 영화에 납치당하는 경험이라고 믿는다. 잡지는 토끼굴이어야 하고, 발견을 위한 통로여야 하되, 신중하고 사려 깊게 설계된 것이어야 하는데 결정적으로 경계가 있어야 한다. 앞표지와 뒤표지라는 경계 말이다. 그 두 표지 사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글이 펼쳐져 있다: 짧은 뉴스 기사, 트리비아, 리뷰, 에세이, 리스트, 오피니언, 인터뷰, 그리고 구술사(oral history)까지. 최근에는 한 감독과 나눈 무려 2만1천 단어에 달하는 방대한 대화를 실었다. 기사의 끝에서 페이지를 넘기면 새로운 영화 혹은 주제가 당신을 맞이한다. 잡지가 품고 있는 이 다양성을 풀어 쓰자면 이러하다. 백지의 페이지들이 포맷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수많은 기회, 주류 미디어가 관심 갖지 않는 영화들과 영화인들, 아카이브와 영화제를 다룰 수 있는 가능성. 이것이 신문사나 출판사, 또는 여기보다 더 나은 곳에서 일하지 않고 영화잡지에 나를 묶어두는 이유다.

이번주에 내가 읽은 것 중 가장 슬픈 것은 한 초등학교 입학반 교사에 대한 뉴스 기사였다. 그 교사는 반 아이들이 책을 집어 들고는 (화면을 넘기듯) 스와이프하는 것을 목격했다. 독서는 사라져가는 취미이며 문해율은 가파르게 하락 중이라고 보도된다. 그런데 왜 영화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는가? 결국 영화도 독서와 같은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지치고 흐트러진 디지털 주의력을 낚아채기 위해 첫 몇분 안에 폭발과 설명 대사를 넘치도록 쏟아붓는 영화가 아닌 이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영화 문화는 잉크와 종이를 받을 자격이 있다. 어떤 영화와 어떤 감독을 다룰 것인지 알고리즘이 아니라 편집자들이 논의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영화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새롭고 도전적인 방식으로 분석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앎을 넓혀주는 필자들이 필요하다. 편집자는 그들과 함께 논지를 다듬고 미처 다루지 못한 영역을 제안한다. 그런 다음 디자이너는 촬영감독이 영화의 한 프레임을 구성하듯 지면의 크기와 비례를 숙고해야 하고, 기사가 탐구하는 주제를 생각하여 글을 이끌어갈 적절한 이미지와 헤드라인의 타이포그래피를 선택하며, 리드 문구를 어디에 배치할지, 본문과 인용문과 이미지가 어떻게 상호작용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 후에 교열 편집자(sub-editor, copy editor)들이 리드 문구를 쓰고, 난해하거나 거들먹거리는 표현의 의미를 따져 묻고, 팩트를 확인하고, 오탈자를 교정한다.

잡지의 경이로운 점은 모든 사람이 함께 지면 위에서 작업한다는 것이다. 그 이면의 인간적 노고가 자아내는 대중의 경탄은 극히 미미하겠지만, 영국 잡지 업계에서 플래널 패널(flannel panel)이라 부르는 판권면을 읽는 경험은, 영화의 모든 장인을 열거하는 크레딧을 보는 경험과 닮았다. 두 경우 모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마감 기한에 맞춰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썼다는 점에서 비슷하고, 여기서 무언가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정의를 빌리자면 “삶을 좀더 즐길 만하고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 어쩌면 예술이다. 중요한 것은 둘 다 유한성과 싸운다는 점이다. 인쇄물에서 공간은 무한하지 않다. 잡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문장이, 이 이미지가 최선인가? 이것이 무엇을 더하는가? 이것이 필요한가?

당신도 이미 알겠지만 이 모든 것이 들리는 것만큼 찬란하지는 않다. 나의 업무 시간 중 상당 부분은 확실히 단조로운 일들에 쓰인다: 기고자들에게 고료 청구서에 인적 정보를 채워달라고 요청하고, 마감을 넘긴 필자를 재촉하고, 기고를 희망하는 필자에게 왜 그 기획안이 적합하지 않은지 설명하고, 홍보 담당자에게 취재를 요청하고, 회의를 잡고 등등등. 아마 그래서 영화잡지 편집자에 관한 영화가 이토록 드문 것이리라. 수많은 이메일을 보내거나 기사 속 한 문장의 의미를 미세하게 조율하는 현실은 딱히 영화적이지 않다. 때때로 나는 내 일상이 1957년 뮤지컬영화 <화니 페이스>에 나오는 패션잡지 편집장 매기 프레스콧(케이 톰슨)의 삶처럼 노래, 춤, 색채의 향연이기를 바란다. 그녀는 영화를 열며 다른 모든 색은 무시하고 “핑크를 생각하라!”(Think pink)고 외친다. (그리고 나중에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함께 <Clap yo’ hands’>에 맞춰 환희에 찬 자이브를 추면서 상대를 완전히 압도한다.) 핑크를 생각하라. 이것이 잡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한달에 한번 정도 나오기 때문에 뉴스 사이클에서 약간 비켜서 있을 수 있고, 그래서 때로 엉뚱하고 독특하며, 바라건대 의제를 깊이 있게 설정하는 기획을 꿈꿀 수 있다. 1952년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뚝딱 만들어낸 “위대한 영화”(The Greatest Films of All Time) 투표처럼. 비평가들이 역대 최고의 영화 10편을 선정하는 이 게임은 이후 10년 주기로 70년에 걸쳐 엄청난 기대와 뜨거운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행사가 되었고 실로 위대한 영화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왔다.

인쇄 잡지가 20년 후에도 존재할까? 나는 종종 그것을 궁금해하며 또 하나의 질문도 함께 떠올린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을 질문, 생성형 AI가 내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각도 청각도 없고, 시간에 대한 인식도, 감정에 대한 친숙함도 없는 AI가 어떻게 영화를 보고 자신이 ‘그동안 보아온’ 다른 영화들과 나란히 놓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AI 합성 미디어가 범람하는 시대, 대학에 가는 것이 너무도 비싸진 시대, 나아가 대학 스스로가 예술 관련 학과를 축소하는 시대, 영화 문화가 마케팅과 팬 주도의 ‘콘텐츠’에 잠식당하는 시대에 사려 깊은 영화가 사려 깊은 정신에 도달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 하나의 경이를 다시금 되찾고 발견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이 100여장이 합쳐져 영화라는 예술 형식에 대한 당신의 감상을 깊게 해주는 글들로 빼곡히 채워진 그것. 그 묶음 속에서 다음에 무엇을 읽을지 선택하는 주체가 바로 당신, 독자인 경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