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29일 발행호. <뉴요커>가 아카데미 시상식을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하며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으로도 채택했다.
1925년 편집자 해럴드 로스가 창간한 <뉴요커>는 본래 문학과 시사, 유머를 위한 잡지였고 영화는 오랫동안 이 세련된 지면의 하위 장르로 취급받았다. 최초의 정규 영화평론가인 존 모셔가 1928년부터 1942년까지 매주 리뷰를 썼지만, 그의 글은 할리우드 황금기를 재치 있게 관찰하는 소품에 가까웠다. 전환점은 1968년, 편집장 윌리엄 숀의 결단으로 찾아왔다. 소설이나 연극에 쏟는 만큼의 집중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두명의 비평가를 6개월씩 교대로 기용하는 파격적 구조를 설계했다. 영국 <옵서버>의 스타 비평가 퍼넬러피 질리엇과 여성 잡지 < 맥콜스>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혹평했다가 해고된 폴린 케일이었다. 케일이 거침없는 구어체와 호전적 논쟁으로 독자를 양분했다면, 질리엇은 한층 독자를 초대하는 목소리였다. 이후 폴린 케일은 <보니 앤 클라이드>를 향한 당시 평단의 지배적 혹평을 뒤집고, 로버트 올트먼의 <내쉬빌>완성 전에 선제적인 예찬을 발표하거나 마틴 스코세이지 같은 감독들을 독려하면서 <뉴요커>를 미국 영화 담론의 결정적인 한 장소로 만들어갔다. <뉴요커>로서도 이례적으로 7천 단어 이상의 영화 리뷰, 에세이를 싣기 시작했다. 케일이 1991년 은퇴한 뒤에는 평론가 태런스 레퍼티, 앤서니 레인, 데이비드 덴비 등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리처드 브로디는 1999년부터 <뉴요커>에 고다르, 트뤼포 등 프랑스 감독들에 대해 기고하기 시작했고 온라인 칼럼을 맡았다. 브로디는 케일이 거부했던 작가주의를 <뉴요커> 안에서 계승하고 온라인 칼럼의 접근성을 발판 삼아 시상식, 영화제 이슈 등을 포괄하면서 인지도를 얻은 독특한 인물이다. <뉴요커>의 최근 지각변동은 30년간 정기적으로 영화 리뷰를 썼던 앤서니 레인이 예술 전반에 대한 에세이와 르포르타주로 영역을 변경하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저스틴 창이 영화비평 섹션에 합류한 것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작가주의의 이론적 산실이었고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정전의 아카이브였으며 미국의 <필름 코멘트>가 동시대 독립영화의 전초기지였다면, <뉴요커>는 이 모든 전문지와 본질부터 다른 방식으로 영화비평사에 개입해왔다. 잡지의 영화 글은 대부분 이론적 프레임보다 산문의 힘을 중시하고 필자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폴린 케일이 영화비평을 카리스마 넘치는 사교계의 화두로 격상시켰다면, 앤서니 레인은 이를 에세이 예술로 유려하게 다듬었고, 리처드 브로디는 디지털 시대에 영상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비평의 속도와 범위를 확장했다. 종이 잡지라는 물리적 한계 안에서 <뉴요커>는 영화를 다루되 ‘영화만’ 다루지 않음으로써 어떤 전문지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영향력과 필자의 이름들을 100년에 걸쳐 지켜온 셈이다. <뉴요커>를 통해 동시대 영화들은 문학과 정치, 사회와 감각의 교차점에 놓인 채로 미국 밖으로, 또 미국 안으로 뻗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