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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어떤 영화 문화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

서울영화센터 논란을 바라보며 시네마테크의 본원적 의의를 생각하다

서울영화센터 개관을 둘러싼 논란의 한복판에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려 한다. 시네마테크란 무엇인가? 명칭 이상으로 영화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향유할 것인지에 관한 본질적 물음이다. 세계의 주요 시네마테크들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이 기관들이 공유하는 몇 가지 변하지 않는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시네마테크에서 중요한 것들

BFI 사우스뱅크.

시네마테크라는 개념은 1930년대 유럽에서 태동했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기, 수많은 필름이 파괴되고 유실되는 것을 목격한 영화인들은 영화를 문화유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35년 런던의 내셔널 필름 라이브러리(현 BFI 국립아카이브), 1936년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설립되었고 1938년에는 이들 기관이 모여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을 창설했다. FIAF는 현재 80개국 184개 기관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기관의 핵심 원칙은 명확하다. 첫째, 지속성이다. 시네마테크는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다. 영화 보존과 상영은 세대를 거쳐 이어져야 한다. 파리 시네마테크가 89년, 영국영화협회(BFI)가 92년, 2018년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독립한 일본 국립영화아카이브(NFAJ)가 70년 넘게 제도적 안정성을 확보하며 지속되어왔다. 둘째, 독립성이다. 재정은 공공에서 나오되 프로그래밍과 수장은 전문가의 몫이어야 한다. FIAF는 정기적으로 시네마테크 프로그래밍 교육과정을 운영하며 전문성 강화를 지원하는데, 이는 곧 최초 채용에서부터 프로그래밍의 깊이와 신뢰를 담보하는 인력의 필요를 역설한다. 셋째, 비상업성이다. 시네마테크는 인기 몰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상업적으로 실패했거나 잊힌 작품들, 실험적이고 난해한 영화들을 상영하는 것이 시네마테크의 존재 이유다. 그래서 공공 지원이 필수적이다.

세부를 들여다보자. 앙리 랑글루아가 1936년 설립한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역사는 시네마테크의 독립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랑글루아는 명확한 사명 아래 4만여편 이상의 영화를 수집했고 그의 프로그래밍은 미국 B급 영화에서 실험영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이러한 자유로움 속에서 프랑수아 트뤼포, 장뤼크 고다르, 자크 리베트 등 누벨바그 감독들이 탄생했다. 1968년 2월, 문화부가 재정 문제를 빌미로 랑글루아를 해임하려 하자 전세계 영화인들이 반발했다. 장 르누아르, 찰리 채플린, 오슨 웰스가 항의 성명을 발표했고 파리 거리에서는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되 프로그래밍과 운영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시네마테크는 언제든 정치적 압력에 굴복할 수 있으므로 독립성의 사수는 영화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현재 파리 시네마테크는 민간 협회 형태로 운영되지만 정부 보조금을 받는다. 연간 2천여회 상영, 대규모 기획전, 멜리에스 박물관 운영 등의 활동은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1979년 다큐멘터리 감독 로버트 가드너, 철학자 스탠리 카벨, 영화학자 블라다 페트릭이 공동 설립한 하버드 필름 아카이브는 대학 기반 시네마테크의 이상적 모델이다. 하버드 도서관 산하 기관으로 3만편 이상의 영화를 소장하며 188석 규모의 극장에서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연중 상영을 진행한다. 하버드 아카이브의 특징은 학술 연구와 공공 상영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이다. 빔 벤더스, 아녜스 바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 같은 거장들을 정기적으로 초청해 관객과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원본 포맷 상영을 고집한다. 현 디렉터 헤이든 게스트는 미국 전역에서 예술영화 상영관이 급속히 사라지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사명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대학이라는 항구적 모체 안에 있지만 프로그래밍과 수장에 대해서는 자율성을 보장받으면서 공공 지원과 전문가 독립성이 양립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1933년 설립된 BFI와 산하의 국립아카이브와 2007년 독립한 사우스뱅크(상영관 및 대중시설)는 공적 자금을 받으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하는 가장 오래된 모델이다. 5만여편의 극영화, 10만여편의 논픽션, 62만5천여편의 TV프로그램의 숫자를 자랑하는 이곳은 9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영구적인 국가 저장소로서의 원칙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한국에 필요한 시네마테크의 조건

한국영상자료원 수장고.

한국에는 이미 한국영상자료원이 있다. 1974년 설립된 한국필름보관소를 모체로 국내외에서 제작된 영화 및 영상물 관련 주요 문헌·음향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국가 기관이다. 1985년 FIAF 정회원으로 등록, 상암동 본원의 시네마테크KOFA 3개관과 파주보존센터를 운영하며 한국영화사 연구와 보존의 중추 역할을 해왔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입지는 굳건하지만 현실적인 한계도 오랫동안 지적되어온 바다. 서울 도심과 거리가 먼 접근성 문제, 프로그램 수급 및 디지털 아카이빙에도 빠듯한 예산, 부족한 보존고 공간 문제(올해 7월 기준 필름 수장고 포화율 93%) 등이 있으며 국가 아카이브로서 보존과 복원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도 있다. 2007년부터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와 이명세, 박찬욱,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들이 서울 도심에 민간 주도의 시네마테크 전용관을 요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충무로라는 접근성 좋은 위치에 민간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형태로,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시네마테크를 만들자는 취지였다.

2021년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 이후 15년간의 합의는 무너졌다. 서울시는 공간의 명칭을 서울영화센터로 바꾸고 필름 수장고 대신 공유 오피스를 넣었다. 상영관 운영은 1~2년 단위 공모 방식으로 결정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있으니 중복이라는 간단한 논리인데 서울시가 이 기능 중복을 이유로 폐지한 프로그램이 지난 21년간 운영된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과 18년간 진행된 독립영화 쇼케이스 등임을 감안하면 행정이 나서 생태계를 파괴하는 형국이 더욱 선명히 보인다. 세계의 모범 사례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명확하다. 국가 아카이브(한국영상자료원)와 도심형 시네마테크(서울영화센터가 되었어야 할 곳)는 상호 보완적일 수 있다. 도쿄에는 국립영화아카이브 외에도 아테네 프랑세 문화센터 같은 소규모 시네마테크들이 곳곳에서 관객을 만난다. 큰 도서관이 생긴다고 작은 도서관을 없애지 않는 것처럼 각 공간은 규모에 맞는 고유한 역할이 있다.

한국에 필요한 시네마테크의 조건은 이제 분명해졌다. 먼저 운영의 장기 안정성이다. 1~2년 공모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독립 법인 형태이거나 안정적인 모기관 내의 독립 부서 형태여야 한다. 전문가 집단의 선별과 자율성도 필요하다. 영화사에 대한 이해, 보존 기술, 관객 소통 능력이 필요한 영역이다. 행정가나 정치인의 영역이 아니다. 정치 세력으로부터의 독립, 기존 생태계와의 공존도 핵심적이다. 시네마테크는 ‘블랙홀’이 아니라 허브가 되어야 한다. 시네마테크는 느리지만 꾸준한 헌신 위에서만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 서울영화센터를 둘러싼 논란은 한 건물의 운영 방식을 넘어서는 유구한 주제와 결부된다. 우리가 영화를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문화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인가라는 책임의 의문문이다. 영화가 세계의 기억이라면 이 기억을 지키는 일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지금 한국영화계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방향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