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의 4회 방영을 마친 뒤 만난 차영훈 감독은 쉴 틈이 없었다. 2025년 10월19일부터 4월11일까지 6개월간의 촬영이 끝난 뒤 지금은 “주인공을 성공시키는 게 아닌 시작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후반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편집실에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할수록 모니터 앞에서 고뇌하는 황동만 감독(구교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여전히 <모자무싸>의 세계 안에서 징글징글하게 애틋한 인간들과 복작대는 중인 차영훈 감독의 답변이 앞으로의 전개를 가늠하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 동만처럼 감정 워치를 차고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워치에 어떤 단어가 떴을 것 같나.
불안, 초조, 영광, 설렘. 박해영 작가에게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도 비슷했다. 사실 제안 전화를 받고 바로 답을 드리지 못했다. 정말 잘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호강에 겹다는 생각이 들더라. 올해로 22년차 50대, 경력도 나이도 찬 드라마 PD로서 안정보단 도전이 필요한 시기라는 내적 욕구가 강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내가 깨질지언정 이 기회는 반드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박해영 작가는 어떤 지점을 파고드는 작가라고 느꼈고, <모자무싸>의 어떤 면에 끌렸나.
인간의 수많은 감정을 하나하나 떼어 자세히 들여다보는 분 같다. 내가 잘해보고 싶은 것도 그 하나하나를 생생히 구현하는 것이었다. <모자무싸>가 어떻게 기획됐는지를 작가를 대신해 말하자면 나에게 큰 해를 끼치진 않으나 만나면 불편한 사람들의 특징을 찾아봤다고 한다. 결론을 내자니 그건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몸부림이었고 그 발버둥을 보는 게 왜 이렇게 힘들고 민망한지도 고민해보니 그게 자신의 모습이었다는 거다. 나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깊이 공감했고, 이 감정은 <모자무싸> 스태프 전체가 공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 황동만을 향한 시청자의 반응이 엇갈린다. 애처롭고 자신 같아서 공감된다는 쪽이 있는 반면 자기 연민과 자아도취가 강해 불편하다는 의견도 있다.
모두 예상한 반응이다. 사실 동만의 비호감적인 면들을 줄일 방법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캐릭터가 애매해질 것 같았고, 대본에서 받은 느낌 그대로를 가지고 정면 돌파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황동만은 전형적인 남자주인공과는 거리가 있다. ‘나도 저랬으면 혹은 내게도 저런 애인이 있었으면’ 하고 공상에 빠지게 하는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시청자가 동만에게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어도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이 작품의 목표 중 하나다. ‘나 같으면 저렇게 안 하지만 동만이라 저러는 마음이 뭔지는 알 것 같아’ 같은 반응도 앞으로 점차 나올 거라 기대한다.
- 변은아 PD(고윤정)가 동만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에게 없는 것을 동만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은아는 단단해 보이지만 트라우마에 갇혀 스스로를 조금씩 죽이면서 살아간다. 반면 동만은 바닥까지 떨어져도 가볍게 툭 치고 올라갈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동만을 보며 은아는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느낀다. 후반에 동만이 은아에게 “왜 그렇게 자기한테 엄격해요?”라는 말을 건네는 장면이 있다. 가족도 주지 못한 진심 어린 공감과 위로를 동만이 주고 그로 인해 은아의 삶도 서서히 변한다.
- 대학 영화 동아리로 시작해 지금은 영화인 모임이 된 8인회에서 동만의 존재감이 궁금하다. 멤버들은 동만을 견디기 힘들어하면서도 모이기만 하면 동만이 얘기를 하고 그를 완전히 내치지도 못한다. 대학 시절부터 그의 영향력이 상당했을 거란 짐작이 든다.
대사로도 나오듯 “열받게 하는 뮤즈”인 거다. 멤버들이 만든 캐릭터에는 모두 동만이 녹아 있고 그 사실을 동만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다. 박경세 감독(오정세)의 ‘국민 스트레스 관리반’ 아이디어도 동만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8인회에서 동만은 ‘적어도 내가 꼴찌는 아니야’라는 찌질한 안도감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동시에 멤버들은 언젠가 황동만이 꼴찌에서 벗어나면 그 자리에 내가 갈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산다.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내게도 이런 세월의 친구들이 있기에 절절히 공감하면서 8인회 장면들을 찍었다.
- 드라마의 문을 여는 ‘국민 스트레스 관리반’ 시퀀스의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경세는 국민을 열받게 하는 인간을 처리하는 팀 소속 공무원의 이야기를 5분 넘게 늘어놓는다. 여기서 오정세 배우가 경세가 동만을 얼마나 지긋지긋해하는지를 단번에 알려주는 연기를 펼친다.
테이크를 꽤 갔는데 오정세 배우의 의지가 컸다. 얼마든지 나눠 찍고 편집으로 붙일 수 있었지만 배우가 그 긴 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에, 본인이 준비한 대로 가보고 싶어 했다. 2회에서 경세의 ‘썩은 귤’ 일장 연설도 그랬고. 우리 작품 특유의 길고 깊은 대사가 배우들에게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오케이를 받고도 한번 더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장면의 완성도가 높다고 자부하고 후반작업하면서 현장의 리듬을 최대한 살리려 하고 있다.
- 4회 제작 지원 최종심 신에서 황동만은 ‘왜 영화 하려 하냐’는 질문을 받고 울면서 답한다. 지망생 시절을 떠올린 구교환 배우가 감정적으로 확 몰입한 게 아닌가 싶었다.
대본에 감정이 복받친다는 표현이 있었고 눈물이 터져야 하는 신이었다. 사실 나는 이 장면이 눈물을 즉각 쏟을 만큼 극적 상황은 아닌 것 같아 디렉션을 어떻게 줘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데 구교환 배우가 “잠시만요” 하더니 옆을 본 채로 스탠바이했다. 액션과 동시에 정면을 보는데 눈에 눈물이 가득 찬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 느낌이 정말 좋았고, 감탄스러웠다. 나중에 배우가 본인이 이 신이 대본 읽을 때부터 정말 좋았고, 왜 눈물이 나는지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 대사의 의미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는데 여기서 동만은 이렇게 답한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지구 반대편의 인간을 보면서 저기에도 내가 있구나. 올 포 원, 원 포 올.” 아마도 동만은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고 느꼈을 거다. 거기서 혼자가 아니라는 엄청난 위로를 받았을 거고. 그 진심 어린 마음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