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억원어치의 금을 손에 쥐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외면할 수 있을까.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며 남들보다 어두운 구석이 짙은 희주(박보영)는 연인 도경(이현욱)과의 조용하고 평범한 삶에 만족한다. 그와 함께하는 나날을 진정 사랑한 건지, 아니면 지난한 과거로부터 도망쳐 이곳에 머무르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희주는 더 나빠지고 싶지도, 더 나아지고 싶지도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도경의 비밀스러운 부탁으로 희주는 대량의 금괴를 맡게 되고, 귀중품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두기 위해 자신을 옥죄었던 고향 정산으로 돌아간다. <올드보이> <광해, 왕이 된 남자> <살인자의 기억법> 등 굵직한 스릴러를 작업해온 황조윤 작가와 <공조> <창궐>, 드라마 <수사반장 1958>등 정교한 합맞춤을 유려하게 펼쳐온 김성훈 감독이 만났다. 욕망을 각성하는 박보영, 정극의 열연을 정통하는 이광수, 양아치의 리듬을 완벽 소화한 김성철 등 새로운 모습을 선물하는 배우들의 조화가 운명처럼 맞아떨어진다. <골드랜드>가 감추지 못한, 혹은 감추고 싶지 않은 욕망은 무엇일까. 이 모든 과정을 지휘한 김성훈 감독에게 물었다.
- <공조> 때 각색으로 인연이 있는 황조윤 작가와 다시 조우했다. 각본 단계의 <골드랜드>를 두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
내가 골드랜드를 처음 만난 건 시놉시스 단계일 때였다. 아직 아이템 상태였을 때. 누군가가 돈이든 금이든 어떤 물질을 들고 도망가버리면 남은 사람들이 그것을 추격해나가는 작품이 이미 많았던 터라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확장시킬지 계속해 논의했다. 그중 희주라는 욕망에 눈떠버리는 인물이 있다. 이 관점을 더 파고들길 바랐고 작가님이 너무나 잘 받아주셨다. 본격적으로 스토리를 전개할 때에는 족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앞에 있지만 쉽게 가져갈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무언가. 그렇게 무겁고 거대한 금괴를 마련했다. 희주는 결국 금 때문에 자신이 영원히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욕망이란 무엇일까. 그렇게 가기 싫었던 곳에 오도록 만드는 이 감정이란 도대체 어떤 욕망일까. 사람을 지배하는 정념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 된다.
- 그러고 보니 금괴를 두고 쫓고 쫓기는 장면은 봤어도, 금괴가 너무 커서 특정 공정을 추가하는 모습은 다소 낯선 장면이다.
예상과 달리 쉽게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눈앞에 있는 것과 그것이 실제 내 것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어려운 과정을 감수하더라도 어떻게든 그걸 쟁취해내려는 건 그만큼 욕망이 강해졌다는 뜻이다. 바로 그 전환점이 중요했다. 우리가 희주 역에 박보영 배우를 캐스팅한 가장 중요한 이유기도 했다. 금괴를 보고 바로 도망갈 것 같지 않은, 선하고 평범한 사람의 이미지랄까. 그러다 조금씩 견물생심을 체화해나가는 간격을 그러데이션처럼 서서히 그리고 싶었다. 본래 인간의 삶이 그렇다. 우리는 크고 작은 욕망에 이끌려 삶이 진행되는데 교육이나 사회화, 도덕이 그 욕망을 조절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다 자기 통제가 유독 안되는 순간 사고가 발생한다. 욕망이란 게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동력인지, 동시에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 다같이 생각해볼 수 있길 바랐다. 욕망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어떤 가치를 욕망하고 있을까. 많은 것을 돌아볼 수 있다.
- 희주 역에 단번에 배우 박보영을 떠올렸다고. <골드랜드> 촬영이 시작된 지난해 6월은 박보영이 출연한 <미지의 서울>이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모두 호평을 받던 시기다. 연출자 입장에서는 화제성 측면에서 반가울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 ‘다른’ 박보영을 끄집어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을 것 같다.
박보영 배우가 좋은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던 시기였다. 마음 한편이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아, 이걸 어떡하지. (웃음) 하지만 <골드랜드>에서 희주의 역할과 목적은 분명했다. 박보영이 평소 갖고 있던 이미지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향해가야 했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박보영의 새로운 얼굴이 드러날 거라 생각했다. 이따금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 배우가 작품에 얼마나 진심인지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하루는 메이크업 테스트를 진행하는데 감독 입장에선 희주의 성격상 분장이 최소한으로 들어가길 바랐다. 정말 최소한의 최소한으로 테스트를 마쳤고 그때 보영씨가 먼저 “아닌 것 같은데…” 하더라. 그러고선 그날 밤에 사진이 4장 도착했다. 무엇이 희주에게 가장 어울리겠느냐고. 그래서 내가 1번과 2번이 좋다고 했더니 이렇게 답하더라. “1번은 맨얼굴이고요, 2번은 로션만 바른 거예요!” 그래서 실제 현장에서 메이크업을 거의 하지 않은 채로 촬영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정말 보통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 무엇을 하든 배우가 자신보다 캐릭터를 우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도 많이 배웠다. 이런 배우를 만난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정말 행복했다. 또 하루는 손이 묶인 채 시멘트 바닥을 굴러야 하는 촬영 신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스태프 모두가 긴장한다. 출연진이 다칠 수 있고 실수 없이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때 야읜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보영씨가 밥을 거의 못 먹을 때였다. 내내 힘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활기차고 밝게 웃더라. 왜 그럴까 하고 지켜보니, 자기를 너무 배려하느라 촬영 내용이 별로 좋지 않은데 혹여나 그냥 오케이하고 넘어갈까봐 가장 힘든 날 가장 밝은 모습을 보여준 거다. 무엇보다 스태프도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이 모든 게 결국 박보영 배우가 작품과 연기를 사랑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날 가짜로 끈을 묶으려 하니 진짜로 묶으라고 그러더라. 촬영 끝나고 침 맞으러 가는 걸 봤다. 지금도 그 사실을 스태프들은 모른다.
- <골드랜드>가 빠른 속도로 박차를 가하는 순간은 희주가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드디어 우리는 욕망하는 박보영을 목격하게 된다.
처음엔 분명 남자 친구의 부탁으로 금을 옮겼다. 그런데 점점 돈의 효능감을 몸소 체감하기 시작한다. 희주의 삶에서 처음 느껴보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가족을 돌보거나 어둠의 경로로 무언가를 청탁하는 것들. 세상에 돈으로도 해결하지 못할 일이 분명 있지만 돈이 있으면 조금 더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게 이야기 안에서 정말 중요한 순간이다. 그리고 우기(김성철)가 그런 말을 하지 않나. “돈이 있으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무엇이든 안 할 수 있다”고. 그전까지만 해도 연인 도경이 집세를 몇 개월째 밀리고 통장이 비었다는 것도 알았지만 그것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의 평범하고 조용한 삶이 희주에게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이다. 긁어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고, 도경이 자신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으니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나중에 무슨 일을 해서라도 금괴를 지켜낼 거라고 말하면서 전과 다른 강한 의지를 내비친다. 끔찍이도 돌아가기 싫던 정산은 사실 떠나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그렇지만 금이 거기 있기에, 그리고 금에 마음이 가버린 순간부터 다시 떠날 수 없게 된다.
- 하지만 희주가 지닌 가족적인 면이 눈에 밟히기도 한다. 자신을 방치했던 엄마를 뒤늦게 걱정하는 희주는 결국 가족다움, 가족주의를 욕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 또한 희주를 위한 게 아닐까. 정작 엄마는 자신한테 그렇게 안 해줬는데,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과시하는 측면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희주는 이 금괴를 가질 만한 명분이 계속 필요하다.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옳다는 증명을 스스로 계속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건 엄마가 아니라 진짜 희주를 위한 거다.
- 배우 이광수의 변신이 눈에 띈다. <골드랜드>의 가장 큰 수혜자일 거란 판단도 들었다. 정극의 묵직한 열연을 진중하게 펼친다.
나는 훨씬 전부터 이광수가 지닌 가치를 높게 평가한 사람 중 하나다. 예능적 이미지가 강하지만 더 진지한 연기도 심도 있게 소화한다. 특히 그의 신체적 특징을 조직 간부 박호철을 묘사할 때 잘 활용하고 싶었다. 2m 넘는 장신과 긴 팔다리를 그로테스크하게 비추면 충분히 무서워 보일 거라 생각했다. 나름의 목표도 있었다. 그간 광수씨가 악역을 여러 차례 맡아왔지만 대부분 설정이 많이 들어간 캐릭터였다. 이번 작품에서는 자연스럽게 세월과 흔적이 느껴지는, 내적으로 공포심이 밀려드는 인물로 설정했다. 일부러 욕설도 절제하면서 썼다.
- 술을 많이 마신 사람들이 평소에도 얼굴이 벌겋게 올라오는 것을 보고 ‘술톤’이라고 부른다. 분장만으로 묘사하기 힘든 것인데 그걸 이광수 배우가 보여주더라. 숨을 참은 것인가.
조명의 힘을 빌렸다. 그리고 후반작업에서 피부 톤을 일부러 안 올렸다. 옅은 피부색과 조명이 만날 때 나오는 특유의 컬러가 있는데 다른 캐릭터보다 박호철의 경우 더 많이 신경 썼다. 근데 원래도 사람이 좀 거칠게 생겼다. (웃음) 잘생긴 파는 아니잖아!
- 금괴를 욕망하는 박보영, 공포스러운 조직 간부 이광수, 날나리풍의 김성철. 지금까지 대중이 본 적 없던 배우의 이미지가 작품 속에 드러날 때 연출자로서 무척 뿌듯하고 만족감이 클 것 같다.
나는 옆에서 돕는 역할만 한다. 사실 거의 모든 촬영 작업이 그걸 목적으로 하는 것에 가깝다. 정확히는 새롭다, 안 새롭다보다 그 인물로서 그럴 법한 표정이 나오냐, 안 나오냐가 훨씬 중요하다. 우리 작품의 이야기와 캐릭터가 다른 작품과는 다른 차별점이 있다면 그럴 법한 행동만 해도 자연히 새롭고 낯설어 보일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이전 어디선가 본 것들과 비슷하게 드러나버린다. 단적으로 새롭냐 아니냐만을 볼 게 아니라 그 안에 함축되는 다양한 측면들(새로운 서사, 캐릭터 다양성 등)을 돌이켜보게 된다.
- 지난해 홍콩에서 진행된 ‘디즈니+ 오리지널 프리뷰 2025’에서 한 외국 기자가 질문했다. 현실에서 1500억원이 생기면 뭐할 거냐고. 그때 김성훈 감독과 박보영, 김성철 배우 누구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정작 큰돈이 생겨도 뭘 할지 아무도 모른다. (웃음)
내가 그래서 그 뒤에 진짜 상상해봤다. (웃음) 아무것도 안 하고 한동안 돈을 내버려둘 거다. 사람들은 언제 가난하다고 느낄까? 무언가를 갖고 싶은데 못 가질 때다. 그렇다면 부유함은 언제 느낄까? 뭐든 할 수 있을 때다. 진짜 뭔가를 할 때가 아니라 언제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을 때. 그래서 나도 그 부유함을 그냥 조용히 느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