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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새 시대의 에고, 지난 시절의 낭만 - <마고가 돈 문제에 대처하는 법>으로 돌아본 엘 패닝 배우론

대학생 마고(엘 패닝)는 작문 실력으로 영문학 교수 마크(마이클 안가라노)의 총애를 받는다. 이 총애는 육체적, 정신적 불륜을 포함한다. 잠시 클리셰. 마고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교수는 잠수를 탄다. 세상이 독신모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아는 샤이앤(미셸 파이퍼)은 딸의 결정에 기가 차다. 시청자야 (미셸 파이퍼의 놀라운 연기에 힘입어) 샤이앤의 잔소리 안에 딸의 미래를 향한 염려와 사랑, 분노와 위로가 있다는 걸 알지만 당장 생계가 급한 마고에겐 이 복합적 감정이 사무칠 리 없다. 와중에 모녀와 연을 끊고 살던 아버지 징크스(닉 오퍼먼)가 지낼 곳이 없다는 이유로 마고의 자취방에 기거한다. 마고는 아들 보디의 양육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십분 살리기로 한다. 우아한 글쓰기는 사치다. 마고는 성인 플랫폼에 음담패설로 필력을 발휘하더니 직접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 돼 사진과 영상을 올리고 녹색 외계인이 돼 단편영화를 찍는다. 한데 세상은 임신으로 대학을 중퇴한, 가난한 성노동자 싱글맘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또 한번 위기가 닥치자 마고는 샤이앤, 징크스와 힘을 합쳐 세상에 맞선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을 배우 엘 패닝이 온몸을 던져 생동해낸다.

영화 속 그 집 딸내미

엘 패닝. SHUTTERSTOCK

그때도 지금도, 패닝은 성(姓)인 동시에 호(號)다. 엘 패닝의 시작은 천재 어린이 배우, 다코타 패닝의 동생이었다. 18개월생이던 어느 날 <아이 엠 샘>(2001) 속 다코타 패닝의 아역(!)으로 데뷔한 이후 인생의 94%를 스크린 안에 살았다. 그 덕택에 엘 패닝은 생애주기와 필모그래피가 한 가닥으로 땋인다. <진저 앤 로사>(2012)의 키스신이 인생의 첫 키스였고, 중학교 프롬 파티와 칸영화제가 겹치자 칸의 레드카펫에서 프롬 드레스를 입었다. 그에겐 20대 후반이 된 지금도 장성한 어린이 배우가 으레 받는 상찬이 댓글창에 달린다. “잘 컸다.” 전세계 모든 관객이 명절에 만난 친척이라도 되는 양 그가 배우로서 발휘 중인 여러 강점을 ‘잘 컸다’ 안에 모두 함축시킨다. <마고가 돈 문제에 대처하는 법>처럼 높은 수위의 노출과 현실의 여러 극단을 오가는 연기를 선보이는 작품에서조차 사람들은 이 배우의 성장을 우선 논한다. 왜일까. 그건 엘 패닝이 발휘 중인 배우로서의 재능이나 스타로서의 광휘 모두 일찍이 예고된 자질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엘 패닝은 오랫동안 가족구성원의 일부였다. 그가 오랫동안 소속집단인 동시에 준거집단인 가족 내의 연소자로 분했으므로, 관객은 한 배우를 바라볼 때 자신도 모르게 어른스럽고 관대한 보호자의 시선을 작동시킨다. 그리고 그 집 딸내미는, 영화가 제시하는 갈등의 원인과 해결책을 동시에 내장한 서사적 주체였다. <킴 베신져의 바람난 가족>(2004)에선 제프 브리지스킴 베이싱어의 딸이었고, <바벨>(2006)에선 브래드 피트의 딸이었다. 조금 더 자란 2015년엔 한해에 극작가 돌턴 트럼보의 큰딸(<트럼보>)과 레즈비언 할머니, 싱글맘과 함께 사는 트랜스젠더 소년(<어바웃 레이>)을 연기했다. <말리피센트>(2014)의 오로라 공주는 말리피센트(앤젤리나 졸리)나 요정 3인방과 각각 유사 모녀 관계를 유지했고 <우리의 20세기>(2016)에서도 도로티아(애넷 베닝)는 아들의 여자 친구인 줄리(엘 패닝)를 딸처럼 대하며 그에게 자신의 욕구 불만마저 털어놓는다. 일사불란한 일심동체인 <매혹당한 사람들>(2017) 속 여성기숙학교는 말할 것도 없다. 근래엔 혈연은 아니나 일가족 주위를 공전하는 배역을 종종 도맡는다. 엘 패닝의 브로드웨이 데뷔작 <어프로프리에이트>는 부친상 이후 라파예트 가문의 삼남매가 가산을 처분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이 작품에서 엘 패닝은 막내의 연인 리버로 분하며 블랙코미디를 책임졌다. 근작 <센티멘탈 밸류>(2025)에서도 엘 패닝의 레이첼은 보르그 집안 바깥의 존재였다. 하지만 영화 말미 레이첼의 어떤 결단은, 소통 불능의 두 부녀 구스타프(스텔란 스카르스고르드)와 노라(레나타 레인스베) 사이를 잠시나마 잇는 촉매제로 작동한다. 그러니까 <마고가 돈 문 제에 대처하는 법>에서 샤이앤, 징크스와 지지고 볶는 케미스트리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배우의 자아도 배역의 아크를 만드는 데 한몫했을 터다. 엘 패닝은 스스로를 ‘캘리포니아 걸’이라 정의하지만, 고향 조지아주(미국 남부)의 가풍으로부터 받은 영향 또한 강조한다. “남부의 예절, 환대, 그리고 품위 있는 행동을 기대하는” 엘 패닝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오랫동안 모든 현장에 동행했고, 할머니의 홈스쿨링은 엘 패닝의 초등교육 과정을 대신했다.

한편 촬영장 바깥에서 엘 패닝은 패밀리 비즈니스를 운영한다. 20대 초반의 엘 패닝은 유년기부터 내면화해온 업계의 메커니즘을 반문했다. 20분이 채 안되는 시간 동안 만난 이가 반사적인 추측에 근거하여 배역을 주지 않거나, 전혀 다른 배역으로 배우를 끼워 맞추며 커리어를 좌지우지하는 캐스팅 문화에 신물이 났다. 그래서 엘 패닝은 “권력을 갖기로 결심”한다. 예카테리나 2세로 분한 사극 <더 그레이트>의 프로듀싱을 시작으로, 엘 패닝다코타 패닝과 함께 2021년 어릴 적 키우던 반려견의 이름을 딴 제작사 ‘르웰린 픽처스’를 설립한다. 시리즈 <플레인빌에서 온 소녀>, 다큐멘터리 <마스터마인드>에 이어 <마고가 돈 문제에 대처하는 법>까지 성공리에 제작한 르웰린 픽처스는 여성 작가와 감독들이 어떤 이야기든 연출할 수 있도록 돕는다. 르웰린 픽처스는 일찍이 패리스 힐턴의 회고록 판권을 사두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자매의 이야기인 <나이팅게일>의 프리프로덕션을 진행 중이다.

그 이격에 대하여

<매혹당한 사람들>

배우 엘 패닝과 스타 엘 패닝의 시차(時差)는 이 배우의 발돋움을 눈여겨보게 만든다. 엘 패닝의 필모그래피엔 다양한 시대가 혼재해 있다. 18세기 러시아(<더 그레이트>)와 19세기 미국과 영국(<매혹당한 사람들>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냉전시대의 미국과 영국(<컴플리트 언노운><진저 앤 로사>)을 살면서 <슈퍼 에이트>(2011)와 <우리의 20세기>에선 1979년의 소녀를 연기했다. 취향 또한 앞선 세대의 것이다. <컴플리트 언노운>에 합류하기 훨씬 이전인 중학생 때부터 밥 딜런을 사랑해 그의 브로마이드를 방에 걸어두었으며, 미술학자가 그림을 연구하듯 마릴린 먼로의 인터뷰 푸티지를 10대 시절 내내 분석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시대의 엘 패닝은 Z세대 셀러브리티로서 유행의 첨단을 선도한다. 각종 패션 브랜드의 새 컬렉션을 가장 먼저 입는 모델이고, 어느 레드카펫에 서든 베스트 드레서로 손꼽힌다. 새 시대의 에고와 지난 시절의 낭만을 한몸에 소장한 배우에겐, 선택의 시차(視差) 또한 존재한다. 소피아 코폴라, 니콜라스 빈딩 레픈, 요아킴 트리에르 등 아트하우스의 러브콜을 한쪽에서 받다가도, 디즈니 엔터테인먼트의 프랜차이즈 안에선 <말리피센트>의 공주이며 <프레데터: 죽음의 땅>의 휴머노이드 쌍둥이다. 곧 그는 <헝거게임> 시리즈의 프리퀄인 <헝거게임: 수확의 일출>에서 추첨 수행원 에피 트링켓의 젊은 날을 연기한다. 공작새 같은 화려한 치장이 캐릭터의 본령인 만큼, 패셔니스타 엘 패닝이 이 메이크업을 어떻게 소화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어쩌면 <마고가 돈 문제에 대처하는 법>이 에피 트링켓을 짐작하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에피 트링켓의 쇼맨십은 마고의 부캐 배고픈 유령과 난리법석의 파티 의상은 마고가 입는 수많은 네온 컬러 패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