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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축제가 시대와 발맞추는 방법 - 제27회 전주국제영화제 결산 리포트

<리메이크>

제27회 전주영화제가 펼쳐진 열흘간 간헐적으로 봄비가 내렸다. 강하게 퍼붓기보다는 간간이 땅을 적시는 수준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시원했을, 또 누군가에게는 야속했을 이 날씨는 이번 영화제 전반의 분위기를 닮았다. 항간에는 “눈에 띄는 한국영화가 없다”는 푸념이 들리기도 했으나 SNS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는 작품이 하나둘 등장했다. <너바나 더 밴드> <남태령>은 영화제에서의 호응에 힘입어 폐막 직후 개봉을 준비했다. 훈훈한 골목 상영이 이뤄지는 와중에 영화제를 비판하는 현수막도 내걸렸다. 그 거리를 지나 전주를 떠나며, 올해의 경향과 발견, 사건과 사고를 갈무리해본다.

주최측이 발표한 총 관객수는 6만9490명이다. 이 수치는 지난해를 살짝 밑돌지만, 좌석 점유율은 0.5%가 늘어 82.3%에 달했다. 첫 닷새간의 중간 집계에서 연휴 효과로 좌석 점유율이 전년 대비 약 3% 증가했다. 54개국에서 온 초청작 236편은 월드프리미어 77편, 제작 국가 외 최초 상영인 인터내셔널 프리미어 1편, 아시안 프리미어 55편, 코리안 프리미어 57편 등 신작 위주였으며, ‘미국, 다큐멘터리, 세대 문제’라는 키워드로 간추릴 수 있다.

우선 개막작 <나의 사적인 예술가>를 필두로 미국 작품이 다수를 차지했다. 국제경쟁 출품작만 총 44편으로 미국이 단일 국가로서 1위에 올랐다. 그중 월터 톰프슨에르난데스 감독의 <이프 아이 고>, 잭 오언·케빈 워커 감독의 <크로노바이저>가 초청받았고, <크로노바이저>는 국제경쟁 작품상을 품에 안았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에서 “영화의 질료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묻는 대안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질문”을 마주했다고 평했다. 전주영화제는 한국영화에 필요한 “파괴의 정신”을 지향하며 아방가르드 정신에 입각한 작업을 선보인다는 명목으로 ‘특별전: 뉴욕 언더그라운드-더 매버릭스’를 꾸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마스터즈 섹션의 <리메이크>, 시네필전주 섹션의 <베니타> <메가닥> <나자>, 영화보다 낯선 섹션의 <여덟 개의 다리>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 미국영화의 장르적 다양성을 드러냈다.

영화제 기간 중 가장 빈번히 회자된 작품으로 <리메이크>를 꼽을 수 있다. 이 사적 다큐멘터리는 자신을 “한때 영화감독이었던 사람”으로 소개하는 로스 매켈위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된다. 그가 감독이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감독으로 복귀하게 이끄는 존재는 다름 아닌 그의 죽은 아들이다. 더는 부자가 공존할 수 없는 현재 위로 과거의 푸티지들이 포개질 때, 아버지는 영화라는 부목에 기대 힘겹게 애도의 발자국을 딛는다.

<회생>

공교롭게도 한국경쟁 부문 최고 화제작이었던 <회생> 또한 부자의 다큐멘터리다.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김면우 감독의 첫 장편으로, 그가 법무사인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된 아들로서 카메라를 잡은 결과물이다. 아버지는 코인과 주식으로 파산했고, 개인회생을 돕는 생업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 아들은 자식 된 도리로 그 고통을 함께 진다. 전주의 관객은 자본주의의 아이러니라는 익숙한 소재보다도 그 업보에 응수하는 감독 특유의 위트에 마음을 연 듯하다. <회생>은 최악의 상황에서만 구사할 수 있는 유머라는 게 실재한다면 지켜내고 말리라는 의지가 빛나는 작품이다.

그외에도 한국 다큐멘터리의 약진이 두드러진 한해였다. 폐막작 <남태령>이나 코리안시네마 섹션의 <서울의 밤> <비대면의 시간> <졸업앨범: 선생님을 기다렸다> 등이 각기 다른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포스트 12·3’ 다큐의 흐름을 탔다면, 장윤미 감독의 <관리처분계획—미아리 텍사스 편>, 김경원 감독의 <사랑, 우린 멀리 이곳에>는 한 장소의 생애와 그 안의 군상을 목격했다. 박홍열·황다은 감독의 <음악만세>, 이영곤 감독의 <장명부, 현해탄의 낙엽>, 이종수 감독의 <나타 근영>처럼 특정 인물에 집중한 다큐멘터리들도 이목을 끌었다.

극영화는 다소 부진했다. 한국단편 경쟁작들도 예심위원들로부터 “일종의 젊음을 우대하는 인종차별주의 같은 것”이 배어 있다는 지적을 면치 못했다. 다만 김지현 감독의 데뷔작 <이상 가족>만큼은 전주에서 남부럽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이영진·강진아 배우가 위기의 레즈비언 커플로 분한 이 로드무비는 두 엄마와 두딸이 누군가의 결혼식으로 향하는 동안의 난장을 뒤따른다. “혼인신고한 사람들만큼이나 복잡한 관계”인 부부는 이혼을 점치고, 이를 눈치챈 아이들은 각자의 생존법을 구하고 싶다. 서로를 상처내고 치유하는 여자들의 좌충우돌은 분명 심란하다. 그럼에도 이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가정 안팎의 충돌을 거쳐서라도 수호할 가치가 있다. 영화는 그 또렷한 사랑을 일상의 코미디로 버무려 관객의 지지를 얻었다. 해외 극영화 중에서도 SF 코미디이자 메타픽션인 <너바나 더 밴드>, 블랙코미디이자 기묘한 스릴러인 <피아노 사고>가 영화제 관객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이상 가족>

웃을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단편 <창조> <크로스로드> <핸드 헬드 데이>를 엮은 <하버드 필름 아카이브 단편: 풍경 영화, <숭고함 너머> 상영이 취소되었다. 5월4일 “상영 중 예기치 못한 필름 손상 사고가 발생”한 탓에 영화제는 “추가적인 훼손을 방지하고 필름을 안전하게 보존하고자 협력 기관인 하버드필름아카이브와의 논의 끝에 3회차 상영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영화제는 공지를 서두르며 다음 회차 예매분을 일괄 취소하고 환불 처리했으나 5월6일 관람을 기약했던 관객들은 아쉬움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프론트라인 섹션 선정작 <예스!>를 두고 팔레스타인평화연대와 전주영화제가 대립하는 일도 있었다. 영화제측 리뷰는 <예스!>를 “이스라엘 출신 감독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가자 학살의 목격담이자 그 내면을 담아낸 풍자극”이라 변호했으나, 팔레스타인평화연대는 영화제 개막에 앞서 공개한 입장문과 현수막, 5월1일 벌인 항의 행동 등을 통해 <예스!>의 상영 철회를 촉구했다. “팔레스타인인은 이스라엘 예술가의 성찰을 위한 재료가 아닙니다. 집단학살 현장은 현실감 있는 세트장 따위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는 위 문장에 덧붙여 <힌드의 목소리> <영혼을 손에 품고 걷는다> <피에 흠뻑 젖어: 아민 사미르 칼리파의 살해>와 같이 피해자의 시선을 위시한 영화들을 거론했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이스라엘영화는 있는 반면 팔레스타인영화는 한편도 없”는 전주영화제 프로그램의 한계를 짚은 것이다. 그러나 영화제측은 이스라엘 외에도 프랑스, 독일 등 다국적 자본이 제작에 참여했으며, 작품에 대한 판단은 관객에게 맡긴다는 이유로 상영을 지속했다. <예스!>는 4월30일부터 5월6일까지 세 차례 관객을 만나 토론을 낳았다. 감독은 적확한 맥락과 수위로 자국의 전쟁범죄를 성찰했는가.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따라 관객이 영화제의 선택을 수용하는 범위가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