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나홍진 감독은 처음부터 작품 제목을 ‘희망’으로 떠올린 다음 영어 표기를 결정했고, 작품의 배경인 어촌 마을 호포를 Hope로 영문 병기했다. 그에게 갑자기 왜 희망이란 테마가 당도했을까. 5월18일, 뤼미에르 대극장 초연 다음날 나홍진 감독이 한국 매체와 라운드테이블을 가졌고 <씨네21>은 일대일 인터뷰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홍진 감독은 <호프>를 “세계 곳곳에 전쟁이 임박해 보이고 인간이 사는 이 행성이 너무도 불길하게 느껴지는 시기”에 썼다고 회상한다. “인간들의 이야기를 넘어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들을 경유해 질문을 던졌고 <곡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 소재로 다가간” 이유였다. 호포를 DMZ 인근 지역으로 연상한 까닭 역시 “먹먹하게 고립된 공간, 즉 우주적 관점에서 봤을 때 가장 낮고 외진 위치에서 시작해야 이야기가 비로소 확장될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감독이 묘사하기를 <호프>의 등장인물들은 크든 작든 자기만의 희망을 품고 산다. 영화는 그 희망들이 충돌하는 이야기다. “희망은 성사되는 순간 희망으로서의 기능을 잃는다. 가능한 순간 더 이상 희망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희망의 충돌은 불가능을 의미한다.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도 악의가 없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전부 이해되는 입장들이 있다. 그런 개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제목 자체가 주는 기운이 강렬하다. 의미가 아니라 감각적인 측면에 있어 ‘호프’라는 제목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도 있나.
에너지. 엄청난 에너지를 담고 있는 단어가 필요했다.
- 당신의 영화에서 진정 무서운 것은 ‘빌런’이 아니라 우리 인식의 한계다. <추격자>의 사이코패스 살인마, <황해>의 부패한 폭력의 생태계, <곡성>의 선과 악, 정체불명의 외계인이 등장하는 <호프>까지. 알 수 없는 타자에 대한 탐구가 왜 중요한가.
타인이 무엇이냐, 타인이 누구냐, 타인이 왜 그러느냐에 따라서 비슷한 순간이 천지 차이의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쓸 때 매번 주인공이 마주한 타자에 집중한다. 그 대상을 다루는 스타일은 꾸준히 바뀌어왔던 것 같다.
- 따지고 보면 출장소장 범석(황정민)은 마을의 권력자인 셈인데 정작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는 힘을 못 쓴다. 주인공이 무력하고 겁먹은 남자의 초상인 점도 타자를 받아들이는 위치와 관련이 있나.
누구의 시선을 따라 이 구조를 뚫고 나아갈 것인가 질문했을 때 가장 적합한 인물형이었다. 인물들이 모르는 것을 알아가거나 혹은 모르는 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의 연속이어야 했다.
- 악의 경계가 흐려지는 <곡성>을 지나 <호프>에선 악이 부재한다고도 할 수 있을까. 이번 영화는 외계종의 불가해함에 몰두하지 않고 아예 그들은 “우리와 종이 다르다”고 시원하게 못 박는다. 그래서 외계 존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 역시 거침없고 무자비한 처단자들일 수 있다. 주인공들을 얼마간 풍자적 위치에 놓고 싶었나.
이 질문을 받으니 편집을 손보고 싶은 욕구가 실시간으로 든다. 그런 뉘앙스를 더 선명히 강화하면 좋을지 마지막까지 고민한 게 사실이다. 칸에 와서 전반적으로 드는 생각은 더 과감해지고, 더 명쾌해져도 될 것 같다는 쪽이다.
- 범석이 영화 중반부쯤 위협적인 크리처에게서 슬픔을 알아보고 불현듯 연결감을 느끼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본격적인 전환 국면에 존재간 접속의 장면이 왜 필요했을까.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면서 썼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쯤에는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 게 좋을까, 우선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어야 했다. 사냥하던 존재가 사냥 당하게 되는 것처럼. 그 구도 속에서 두종이 서로를 알아차리는 어떤 지점이 나온다.
- 허둥지둥하던 범석이 실수로 외계인이 아니라 동네 친구를 다치게 하는 설정을 코믹하게 그렸다.
같은 종(種) 사이에서 이건 매우 큰 사건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메인 사건들과 비교해보면 관객들에겐 큰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뭐 그런 얘기다.
- 성기가 우두머리로서 이끄는 거친 청년 일당들의 포지션이 독특하다. 사냥과 낚시를 하며 돌아다니는 백수들인데 외계인의 근원지를 찾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가? 내가 어릴 때 동네에 늘 그런 삼촌들이 있었던 것 같다. 특정한 일 없이 이런 일 저런 일 생기면 닥치는 대로 하고, 낚시든 사냥이든 뭐든 즐길 수 있는 레저를 즐기며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 부분적으로 컬트 코미디 또는 다크 코미디라 불러볼 만한 희극적 요소들이 낯설 정도로 두드러진다. 임현식 배우의 원맨쇼에 가까운 회상 신, 죽은 크리처를 아주 웃긴 방식으로 부검하는 신이 회자될 만하다.
이런 장르로서 지녀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들이 있을 텐데 그것들을 넣되 변주하는 의미로 한데 담아본 것이다. 외계 존재를 부검하는 장면은 SF의 한 의례일 수 있을 테지만 과연 <호프>를 SF라고 수식할 수 있을까, 질문해볼 수 있겠다. 나는 모르겠다. 장르 구분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편의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라고 본다. 해술 아저씨(임현식)가 성애(정호연) 앞에서 외계인과의 조우를 회고하는 장면은 전쟁 세대 어른들 특유의 모습, 그들이 대화를 끌어가는 전형을 담고자 한 것뿐이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이 ‘웃길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대체로 다듬는 과정에서 나중에 판단하고 디테일을 잡아나갔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언젠가부터 시나리오를 쓰면서 자꾸 장르를 가지고 놀려고 장난을 치는 것 같다. 전에는 경직된 상태로 작업한 듯한데 이제는 조금 자유로워진 것 같다.
- 인물들은 주로 단말마의 비명이나 욕설을 내뱉고 진지한 대화 대신 농담 따먹기를 한다. 의식적으로 의미망을 피해가는 만담식의 대화들을 꾸린 건가.
이 영화가 미스터리를 계속 벗겨가는, 어떤 사건의 근원을 향해가는 영화일 수 있는데 그 여정에만 몰두해서 걸어가는 게 재밌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계속 이걸 방해하는 장치를 만드는 거다. 동시에 그 장치 자체가 너무 큰 의미를 담고 있으면 안된다. 임현식 선생님의 신들은 그런 측면에서 상징적인 예일 수 있을 것 같다. 왜 영화가 자꾸 딴 데로 새는 척하고, 목적지로 다가가고 있으면서 아닌 척하고, 자꾸 집중을 못하게 하는지 그것 자체에 몰두할 수도 있지만 해술 아저씨를 보고 있으면 이 또한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나이 든 어르신들이, 시골 사람들이 그냥 그러는구나 싶어지는 정도에서 멈췄다.
- 어촌 마을 곳곳에 반공 푯말이 걸린 배경 미장센이 보인다. 마을은 DMZ 인근이라지만 정확히 위치화되지도 않는다. 시공간을 일부러 특정하지 않으려 했나.
이 말을 처음 하게 되는데, 사실 나는 여기가 지구라는 얘기도 한 적이 없다.
- 아니, 그건 너무…. (웃음)
범석의 파출소 사무실에 보면 태극기가 걸려 있잖나. 그걸 넣는 게 아닌데, 실수였던 것 같다.
- 한국 어촌과 어울리지 않는 장대한 루마니아 국립공원 로케이션의 선택도 같은 맥락인가.
그건 아니다. 한국의 숲속에서는 <호프> 규모의 촬영을 할 수 있는 곳이 애초에 없을뿐더러 여러 가지 여건이 안돼 그랬던 거다. 오로지 현실적인 이유에서 루마니아로 갔다.
- 한국영화 최대 제작비, 따라서 예상되는 높은 손익분기점 등이 화제가 되고 있고, <호프>의 해외 판매가 예상보다 더 호조라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궁금한 것은 <곡성> 이후 이토록 큰 규모의 영화를 지향한 이유다. 산업적으로 어떤 필요와 갈증을 느꼈나.
내가 여기서 그냥 단순하게 ‘시나리오를 썼고, 그 시나리오를 영상화하기 위해서 이 비용이 필요했을 뿐’ 정도로 말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정도의 제작비가 애초에 한국 시장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의 회수를 생각하고 쓰일 수가 없다. 수년 전 <호프>를 기획했을 당시엔 지금만큼 한국 영화산업의 위기론이 만연할 때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위기감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곧 올 텐데 그게 언제일까, 하고 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고 위기가 엄청나게 가속화되더라. 복잡하고 긴 얘기지만 이러한 위기 속에서 만약 어떤 ‘모델’을 제시한다면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앞으로 올 위기를 타개해나가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손익분기점을 달성하냐, 마냐가 아니라 작품이 수익을 만들어내서 그 산업이 지속되고 연속되고 확장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 영화산업에서 우리가 아는 지당한 방법, 해오던 방법의 반복을 통해서는 아마 탈출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모색을 해야 한다. 나로서는 이 방법에 확신을 갖고 시작한 일이다. 고맙게도 플러스엠이 투자를 했고 프로듀서도 나와 같은 발상으로 모험을 감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