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은 공동 수상이었다. 바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의 비르지니 에피라와 오카모토 다오가 그 주인공이다. 요양원 책임자인 마리루 폰텐(비르지니 에피라)은 휴머니튜드(Humanitude)라는 인간 중심의 돌봄 방식을 시설에 도입하고자 하지만 효율성 측면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떠안은 직원들은 이에 저항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암 투병 중인 일본 연극 연출자 마리 모리사키(오카모토 다오)를 만나고, 두 사람은 점점 깊은 관계에 안착한다. 영화는 결코 쉬운 길로 가는 법이 없다. 삶과 죽음, 돌봄노동과 인간존엄성 등 철학적인 사색을 전하는 동안에도 프랑스인 비르지니 에피라는 일본어를, 일본인 오카모토 다오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교차된 언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함께 전한다. 롱테이크가 많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영화의 특징을 딛고 언어적 미션까지 수행해야 했던 비르지니 에피라를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우주연상에 닿은 것은 그의 유려한 연기뿐만 아니라, 홀로 고민하며 보낸 시간과 성실함도 함께 있었다.
-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단연 일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모습이다. 일본어는 어떻게 배웠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나한테 읽기를 먼저 배우라고 하더라. 우리의 작업은 영화 속 세계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지, 영화를 위한 무언가를 형상화하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모든 게 영화의 일부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그는 모든 스태프에게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특별한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렇게 읽기를 시작하고 그 뒤에는 소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일본어 선생님을 모시고 알파벳부터 히라가나까지 하나씩 배워나갔다. 나중에는 핸드폰에 모든 일본어 문장을 녹음해서 듣고 따라 했다. 하마구치 감독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모른다. (웃음) 그는 내가 일본어를 조금이라도 잘못 발음하면 맨 앞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촬영했다. 롱테이크의 긴 신이라도, 상당히 오랜 시간 촬영을 마쳤더라도 다시 맨 앞으로 도돌이표. 하마구치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류의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면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것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조명하는 감독이다. 그는 일본어가 진정한 의미로 나의 일부가 되도록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체득되길 기다렸다.
- 그렇게 긴 대화들이 많았는데도 맨 처음으로 돌아갔나.
그러니까 내 말이. (웃음) 그렇게 긴 대화였는데도…. 하마구치 감독은 그런 정신이 있었다. 이 대화를 연기로서 완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대화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 있도록 내가 그 언어 안에 자유롭게 있길 바랐다. 단순히 언어 문법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 언어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것과 같다. 생각하는 방식도, 감정이 흐르는 방식도 언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일본어는 상대방의 진심을 느껴야만 하는 언어에 가깝다. 상대방의 진의와 의도에 따라 반응하는 발화 방식이 다르게 나타난다.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공동 수상의 기쁨을 나누는 오카모토 다오와 비르지니 에피라 (왼쪽부터). 사진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 속 대사들은 무척 시적이고 문학적이다. 가장 좋아하는 대화를 꼽는다면.
자본주의로 인해 일본 사회 문제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마리와 이야기를 나눈 장면을 좋아한다. 저출생이나 고령화 같은 문제들이 자본주의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나누던 그 장면. 우리도 가끔 이런 말을 생각 없이 던지곤 하지 않나.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데…”라고. 물론 금전과 관련된 치명적인 일들도 있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을 자본주의와 결부시키는 건 위험하다. 이 장면이 내 마음에 남는 이유는 요양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자기만의 신념을 쌓은 마리루의 모습이 잘 드러나기도 하고, 안정적인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마리의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해서다. 나는 실제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진짜 좋은 대화란 상대방의 생각 중 틀린 것을 찾아내 설득하는 게 아니라, 서로 갖고 있는 확고한 신념을 나란히 병렬해나가는 대화인 것 같다. 정치도 감정도 마찬가지다.
- 영화는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 영화를 통과하면서 스스로에게 알게 된 점이 있다면.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다>에는 왜 사람들이 연결된 채 살아야 하는지, 그런 삶의 방식이 왜 중요한지 알려준다. 심지어 이렇게 들리기도 한다. ‘넌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그냥 연결돼 있기만 해도 돼.’ 나 또한 영화를 촬영하며 여러 캐릭터와 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많이 느꼈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그 호기심이 커질 때 마리루의 표정이 더 잘 드러나기도 하고. 또 이 영화는 시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랄까. 서로를 찌르는 말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성장의 비료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성장을 멈추게 한다. 그렇기에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 어떤 측면에서는 마리루와 마리 사이에 로맨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가 그것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눈빛, 행동에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하마구치 감독은 그렇게 말한 적 없지만, 나는 이 영화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레즈비언영화라고 생각한다. 연기를 하면서도 그랬고,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에도 그랬다. 또 다른 차원의 사랑이랄까. 바라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 출발한다. 조금 더 심플하게 말하자면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뜻이다. 퀴어의 사랑이 이성적 사랑과 다를 게 없으니까. 연기할 때에는 머릿속이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비록 세상을 바꿀 자유나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을 향한 특별한 시선을 담아내는 것도 충분히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안아주면서 지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