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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실패하여 의미 있는 영화들, <쿠소필리아> 박동수 영화평론가

<쿠소필리아>란 무슨 의미인가. 영화광이란 뜻으로 통용되는 ‘시네필리아’와 비슷해 보이지만, 앞에 ‘쿠소’(クソ)가 대신 붙는다. 직역하자면 ‘구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조악하고 저질스럽고 엉성한 영화에 신기할 정도의 애호를 지닌 관객들을 일컫는다. 책에서는 식인 초밥이 날아와 사람들을 살해하는 <데드 스시>(2012) 같은 작품을 쿠소 영화의 대표적 예시로 든다. <쿠소필리아>는 쿠소 영화 담론을 국내에서 깊이 있게 다룬 이례적 단행본이다. 저자는 1990년대에 태어나 DVD, IPTV, 인터넷 등으로 온갖 쿠소 영화를 탐닉하는 한편 시네필리아의 길을 걷기도 한 박동수 영화평론가다. 저자의 흥미로운 20년사 에세이이자, 쿠소 영화의 정의와 계보를 깊이 탐구한 영화 연구·비평인 동시에, 생성형 AI 영상의 현황 등 동시대 미디어 콘텐츠의 담론까지 풍부하게 품은 책이다. 쿠소 영화를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지만, 책은 전혀 ‘쿠소’하지 않다.

- 쿠소 영화나 쿠소필리아라는 용어가 낯선 독자들도 있을 텐데. 책 구성의 방점을 어디에 뒀나.

쿠소 영화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부분에 가장 신경 썼다. 쿠소 영화를 인터넷에 검색하면 오만 영화가 다 언급된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본 실험영화를 보고 쿠소 영화라 하고, 하물며 <호프>도 쿠소 영화라고 하니 우선 용어 정의부터 선행되어야 했다. 기본적으로는 ‘실패의 영화’라고 썼다. 연기, 편집, 연출, VFX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실패를 포함해야 한다. 이로써 영화 만들기라는 행위에 담긴 열정과 가능성을 더 의미 있게 되짚어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 <호프>도 쿠소 영화가 될 수 있나.

쿠소 영화와 닮은 점은 있다. 관객이 감독이나 장르, 배우들에게 기대하는 부분들을 영화가 계속 무너뜨리고 빗겨나가니까. 그런데 이것이 모두 작품의 의도이다 보니 실패의 영화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작품을 즐기는 방식은 쿠소 영화와 꽤 비슷하다. <호프>를 좋아하는 분들 얘기를 들으면 늘 영화관의 분위기를 언급한다. 관객들끼리 조금 떠들고 반응하는 게 용인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디세이>를 보며 갑자기 “오디세우스 뒤에 괴물이 있어!”라고 외치면 머쓱하겠지만, <호프>를 보면서는 “황정민(범석 역) 뒤에, 저 뒤에 외계인!”이라고 말해도 왠지 이상하지 않다. 리액션 상영회라고 이름 붙여도 대개 조용한 한국의 극장 문화에서 꽤 희귀한 경우다. 쿠소 영화는 취향이 맞는 친구나 관객들을 불러놓고 함께 웃으며 보는 것이므로 <호프>도 비슷한 결이 느껴졌다.

- 영화를 어떤 태도로 향유할 것이냐가 쿠소필리아의 중요한 조건 같다. 시네필리아가 영화를 일종의 숭배 대상으로 본다면, 쿠소 영화는 관객성에 더 무게중심이 가 있는 듯하다.

시네필리아의 방식으로 쿠소 영화를 즐길 수 있냐 하면 애매하다. 시네필리아라고 하면 독립예술영화관이나 시네마테크, 영화제에 가서 속칭 ‘시체 관극’(시체처럼 꼼짝하지 않고 조용히 연극, 뮤지컬, 영화 등을 관람하는 관객 문화.-편집자)하는 모습을 흔히 떠올리게 된다. 쿠소 영화는 완전히 반대로, 자유롭게 웃고 떠드는 관람을 지향한다. 또 누군가가 한두편 별 뜻 없이 만든 쿠소 영화를 어떻게 시네필리아의 작가주의적 전통으로 논할 수 있겠나. 시네필리아가 어떤 감독, 어떤 시기의 주제를 잡고 영화를 채우는 방식으로 탐독한다면 쿠소필리아는 그냥 마구잡이로 보는 게 기본이다.

- 그러면서도 <쿠소필리아>는 쿠소 영화의 계보를 아주 성실하게 따지는 시네필리아적 작업을 수행하기도 한다.

맞다. 되게 시네필적인 짓이다. (웃음) 기본적으로 시네필리아가 아닌 사람이 쿠소 영화까지 찾아보기는 어렵다. 영화를 즐기는 애호 행위가 결론적으로 어느 정도 겹치게 되는 일은 당연하다. 주변 연구자, 평론가들이 보통 “나쁜 영화를 안 보고 너무 좋은 영화만 봐서는 그 영화들이 왜 좋은지 모른다”라고 이야기하는데, 반대도 마찬가지다. 쿠소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가끔은 말끔한 영화도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쩔 수 없이 두 ‘필리아’는 교집합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 책에선 ‘우리’나 ‘동년배’라는 지칭이 많이 쓰인다. 1990년대생으로의 자의식과 동료의식을 기저에 깔고 있고, AI 시대가 다가오며 쿠소 영화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시대성 짙은 담론을 다룬다는 인상이 크다.

중고등학생 시절, 2010년대에 폭발적으로 나온 CGI 기반 쿠소 영화들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다.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진 셈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반적으로 영화 매체에 대한 대중의 선호도가 많이 떨어졌고, 그 관심이 숏폼 콘텐츠나 AI로 많이 이동한 상황이다. <호프>를 AI로 3인칭 게임처럼 재구성하거나 외계인들에게 K팝 챌린지를 시키는 AI 영상이 영화 관객수만큼이나 높은 조회수를 올리기도 했다. 쿠소 영화란 컬트영화처럼 많은 사람이 호명해줘야 의미가 생기는데, 그럴 만한 절대적 양이나 쿠소 영화의 영역이 축소되고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 “쿠소 영화는 실패의 영화다. 구린 각본, 구린 연기, 구린 CGI, 바보 같은 조합의 이미지는 AI도 생성할 수 있지만, 실패한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것이다. (중략) 실패에는 경이가 숨겨져 있지만 오류 뒤엔 블랙박스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라는 책의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AI는 어쨌거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한 원본이 필요하다. CGI와 별반 다르지 않은 수단으로 여겨질 수 있다. 생성형 AI로 직접 <샤크 스톰>(2013)의 장면을 묘사한 영상을 만들어봤는데 너무 멀끔하더라. 이 과정에서 실패의 가능성을 아직 발견하진 못했다.

- 언급한 <샤크 스톰>, 흔히 말하는 ‘샤크네이도 시리즈’가 책에 주요하게 언급되고, 쿠소 영화의 주요 계보로 상어 영화가 설명된다. 심지어 CGI 상어가 우리 시대의 버스터 키턴이라는 파격적 주장도 등장한다. 문득 궁금하다. 왜 하필 상어일까? 은근히 맹해 보이는 측면이 있어서일까.

딱히 정답은 없지만 가설은 있다. 영화에서 만들기가 쉬운 존재라는 생각이다. 피부가 매끈하고 팔다리도 없고, 움직임이 그리 많지도 않다. 게다가 앞서 말한 버스터 키턴의 예시처럼 무표정하다. 좀 조악해도 봐줄 만한 대상인 것이다. 지지난해에 나온 일본의 <온천 샤크>라는 영화가 있는데, 배우가 그냥 상어 모형을 들고 목에 갖다 대면서 아파하기만 해도 대충 말이 된다.

이 책을 펼치게 할 영화

<샤크 스톰>

“아무래도 ‘샤크네이도 시리즈’일 것 같다. 한국에는 1편 <샤크 스톰>부터 6편 <샤크 쓰나미>까지 여러 이름으로 수입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책에서 가장 많이 얘기한 시리즈이기도 하고, 국내 OTT를 유랑하다 보면 다소 번거로워도 다 챙겨볼 수도 있다. 이런 폭염에 시원하게 보기 좋은 영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