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가족> 이후 허진호 감독은 자신의 특기인 시대극으로 돌아왔다. <암살자(들)>은 1974년 영부인 저격 사건을 모티브로 하되 사건의 배후 혹은 결론을 확정하기보다 그 시대를 살아온 인물들의 서사를 기록한 영화다. 형사와 기자 등 다양한 목격자, 조사자들의 시선에서 역사의 빈칸을 가정과 상상으로 채운다. “어둠의 시대”에서도 주인공들은 굳은 심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는다. 허진호 감독이 오래 품고 있던 작품인 만큼 그의 그 어떤 전작보다 뜨겁다.
- 형사와 기자의 수사 과정이 동시적으로 그려진다. 기자들의 취재가 단조롭게 그려질 거란 우려는 없었는지.
역할을 분담했다. 형사들이 발로 뛰며 수사한다면 기자들은 외신 보도, 인터뷰 등을 통해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식이었다. 기자 중 재환(박해일)이 부장이긴 해도 좀더 움직임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에 최종 수사본부 발표 때 참석하게 만들었다. 영화를 사실적으로 만드는 게 쉽지 않다고 느낀 작품이었다.
- 사건 현장의 기자들이 유선전화를 돌려쓰며 상황을 보고하거나 타자기를 주요 아이템으로 활용한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자료를 기반으로 한 연출이었나.
당시 신문사 풍경이 담긴 사진을 많이 참조했다. 세트 활용을 고민했는데 여러 이유로 결국 로케이션으로 결정했다. 사실 당시 기자들이 타자기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타자기를 탁탁 두드리는 게 펜으로 쓰는 것보다 힘 있게 느껴질 것 같았고 타자기가 지닌 작은 윤전기 같은 느낌도 활용했다.
- 광복절 기념식은 모든 일의 발단이고, 목격자마다 다른 시선으로 사건이 재현된다. 그들의 위치마다 다른 각으로 같은 사건을 보여주는 등 촬영에 고심했다는 인상이다.
철구(유해진), 영일(이민호)이 기념식장 내에서 바라보는 것과 재환이 신문사에서 TV로 현장을 보던 것 등을 전부 따로 찍을 수밖에 없었다. 내 영화 중 <암살자(들)>이 출연자가 가장 많다. 모니터나 현대적 건물이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 화각을 넓게 펼치기 어려웠고 그 안에서 여러 인물의 동선을 짜는 게 쉽지 않았다. 이 시퀀스만 10회차 이상 찍었다. 그동안 내 작품은 객관적인 시선이 주요했지만 <암살자(들)>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시선이 많이 담겼다. 그럴수록 몰입도가 중요해 이모개 촬영감독과 자주 대화를 나눴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공간이 많지 않아 로케이션을 찾기도 어려웠다. 다행히 대학교 강당, 공연장이 고전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어 기념식장 외부는 전북대학교, 내부는 광운대학교, 로비는 경희대학교를 배경으로 했다.
- 6개 탄환의 행방을 설명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관객의 이해를 고려한 결과인가.
배우들이 대본을 읽을 때부터 어려워하더라. 나도 헷갈리는 경우가 있어서 중복되더라도 여러 번 보여주겠다고 결정했다.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 이 상황을 이해해야 관객들이 영화를 쫓아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 감식계장 현도(박지환)와 철구가 암실에서 탄환의 행방을 되짚으며 문태광(박정민) 외 저격수가 존재할 가능성을 제기하는 상황이 흥미로웠다.
배우들과 대사로 한참 씨름한 장면이다. 현장에서 첫 테이크를 가는데 박지환 배우가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다고, 외운 대로만 말하게 된다는 거다. 무조건 하라고 할 수는 없어서 유해진, 박지환 배우와 셋이 둘러앉아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되 이해하기 쉽게 대사를 바꿨다. 다른 스태프들이 전부 식사하러 나갔는데도 우린 끝까지 남아 대사를 조각내고 이어붙였다. 박지환 배우가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시점에 밥도 먹지 않고 찍은 장면이다.
유해진 배우는 전부터 지켜보니 틀에 갇히지 않은 살아 있는 연기를 하더라. 사건을 추격해나가는 철구에겐 그런 힘이 필요했다. 유해진 배우는 대사를 그냥 가져오는 경우가 없다. 항상 자기 식대로 소화해오는데 그런 부분이 나와 잘 맞았다. 박해일 배우의 경우 단편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재환을 상황에 맞게 잘 풀어냈다. 예를 들면 철구가 재환을 찾아왔을 때 “나한테 기사 맡겨놨어요?” 하며 툭툭 대사를 던지는 순간의 느낌이 좋았다.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치면서도 종종 여유를 내보이는 인물을 잘 완성했다. 이민호 배우는 본인이 현실적인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현장에서도 몸을 던져가며 열정적으로 임하더라. 총격 사건 때 넘어진 것도 사전에 계획된 게 아니었고, 정보를 캐내기 위해 상대에게 접근할 때 “쌍화차 좋아하세요?”라며 경계심을 푸는 대사도 본인이 만들었다. 원래 과일 바구니를 들고 가는 거였는데 너무 올드하고 재미없다며 아이디어를 내주더라.
- 문태광은 가장 주목받지만 그의 속내를 알 수 있는 단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지만 그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박정민 배우와도 답을 정해두고 인물에 접근하기보다는 ‘문태광이 왜 그랬을까’, ‘어떤 생각을 했을까’와 같은 질문을 주로 던졌다.
-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하는 재환과 함께 신문사 기자, 직원들이 전부 하나로 뭉치는 장면이 후반부를 책임진다.
미스터리 추적극의 특성을 지녔지만 범인을 체포하는 식의 결말로 끝맺을 수는 없는 영화였다. 당대를 산 사람들에게 집중한 만큼 형사, 기자 개개인이 외압에 저항하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가는 방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어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후반부에 넣었다. 현장에서 외부 세력이 신문사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오는데 자연스레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원래 그런 감정을 잘 찍지 않는데, 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찍어야 되지 않을까 싶더라.
- 자유언론실천선언 낭독과 관련된 실제 자료들과 달리 영화엔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기자 영일의 뒷모습까지 담겼다. 영화가 무엇에 주목하는지 명확히 느껴지는 장면이다.
재환의 감정, 박해일 배우의 감정으로 마무리 짓는 게 훨씬 힘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암살자(들)>에서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자들은 그 순간을 반드시 남겨놓을 것 같았다. 누군가 영일을 막아서려는 모습까지 자연스레 담겨서 그 숏을 자유언론실천선언 낭독 시퀀스의 가장 마지막에 사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