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 ‘배우프로젝트-60초 독백 페스티벌’에서 과거의 자신에게 서신을 남기던 말간 얼굴의 어린 배우는 이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오징어 게임> 시즌2·3, <메이드 인 코리아> <기리고> 등 대중작으로 자신을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주변으로부터 자연스레 이목이 집중되고 모든 일에 행운만 따르는 친구 장태영(변요한)에게 오랜 열등감을 품어온 박태영은 노재원의 날 선 표정을 통해 사랑받지 못한 자의 결핍과 자기합리화를 여실히 드러낸다. 다만 노재원은 박태영의 극단적인 선택을 단순한 악의로 소비하지 않고, 그 안에 남아 있는 외로움과 상처까지 끌어안으며 인물의 복잡한 얼굴을 완성한다. 타락한 천사는 누구에게 어떤 노랫소리를 전해줄까. 선과 악의 경계를 자유롭게 이탈하는 배우, 노재원에게 물었다.
- 얼마 전 진행된 일반 관객 대상의 시사회에서 노재원 배우를 향한 팬들의 스케치북 메시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들었다. 팬들의 반응을 직접 마주한 순간이었을 텐데.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팬들을 눈앞에서 보는 게 너무 신기했다. 편지를 받기도 했는데 네다섯장씩 빼곡하게 쓴 내용을 보니 이게 정말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잊지 말아야겠다,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박태영을 단순히 열등감 많은 사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나이가 들며 여러 감정이 축적된 인물인데, 박태영의 근본적인 욕망은 무엇이라고 판단했나.
박태영은 어릴 적부터 엄마의 학대 속에서 자라 사랑을 받지 못했다. 시나리오상에서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고 아빠가 죽었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담임선생님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장태영을 더 사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공부와 포커뿐이라 믿어서 박태영은 오직 그 두 가지에만 모든 걸 쏟아낸다. 사랑받지 못한다면 이것들을 최선을 다해 해내야겠다는 욕망이 있는 것이다. 원작에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는데 무슨 잘못이 있냐’는 말이 나온다. 정확히 그 말과 같다. 박태영은 사자로 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내가 이토록 불행하고 불우하게 자라왔는데 왜 사랑받으면 안되지?왜 이런 행동을 하면 안되지? 박태영은 스스로 합리화도 잘한다. 그 자기합리화가 잘 드러나도록 연기했다.
- 같은 트랙 안에서 다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질투하는 박태영의 성향은 배우라는 직업에 익숙한 감정과 경험으로 다가올 듯하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이 부분을 어렵게 받아들였다. 배우는 저마다 빛나는 부분도, 빛나는 타이밍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비교할 수 없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사람을 표현하는 직업이기에 사람마다 다른 게 당연한데 어떻게 사람과 사람을 비교할 수 있겠나. 결국 다른 사람을 닮거나 따라가려고 하기보다 나의 빛나는 점을 믿는 게 중요하다. 이번에 그걸 깨달았다.
- 엄마 역할로 등장한 남권아 배우와의 갈등 장면에선 단순히 문제아 아들이 느끼는 공포만이 느껴지지 않았다. 광신도 엄마에 대한 질림과 좌절, 수치스러움과 희망 없음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이 다채로움을 어떻게 녹여냈나.
그 장면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상상이 안됐다. 그저 슬프겠지, 처절하겠지 등 막연한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런데 막상 촬영장에서 연기를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게 자연스럽게 감정이 올라왔다. 사실 폭행 신은 맞는 사람보다 때리는 사람이 더 힘들다. 나는 더 맞고 싶었지만 ‘더 때려주셔도 괜찮다’는 말도 못했다. 선배님이 얼마나 힘들지 아니까. 그 순간 남권아 선배가 갑자기 방언이 터지는 연기를 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면서. 원래 대본에 그 정도까지 상세하게 묘사돼 있지는 않았다. 그 상황을 너무 예상하지 못해서 진짜 박태영이 된 듯 어이없고 억울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겠더라. 너무 놀라서 그렇게 벙찐 표정이 나왔다.
- 미묘한 디테일들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투자가 결렬됐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박태영은 계단 위에서 샴페인과 초콜릿을 먹고 있다. 카지노에서 양주를 마실 때에도 다른 음식이 아닌 바나나를 먹는 등 예민한 면모가 느껴진다. 직감적으로 배우의 아이디어였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그걸 알아차리다니! 사실 예민한 성향까지 깊게 생각한 건 아니다. 두 장면 모두 실제로 현장에서 나온 게 맞다. 특히 투자받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은 박태영에게 무척 중요한 장면이었다. 장태영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날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있어야 할지 더더욱 고민됐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있길 택했다. 초조할수록 단 게 당기니까 초콜릿도 준비했다. 편집된 장면 중에 이런 장면도 있었다. 투자 결렬 소식에 직원들이 나를 쳐다보면 “왜 그렇게 봐요? 왜 나를 못난 사람처럼 봐요?” 하고 말하는. 바나나는 최국희 감독님의 아이디어였는데 박태영이 외로워 보였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의견을 주셨다.
- 박태영의 내적 이야기를 넘어 외적인 준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포커 기술을 익히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준비했나.
촬영에 들어가기 수개월 전부터 김슬기 선생님을 만나 카드 기술을 배웠다. 원래 손기술에 능한 편이 아닌데 하니까 되더라. 어느 정도로 연습했냐면 칩을 들고 살다 보니 나중에는 연기 슛이 들어갔을 때 내가 칩 셔플을 하는지도 인지가 안됐다. 무의식적으로 하게 됐다. 그때 너무 뿌듯했다. 영화는 포커를 잘 모르는 사람과 잘 아는 사람 사이에서 난도를 어디에 맞출지 결정해야만 했다. 그때 홀덤을 아는 사람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리얼리즘과 디테일을 살리고자 했다. 카드 던지는 것, 칩을 세는 것, 카드를 칠 때의 표정까지 습득하고 이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나오도록 노력했다.
- 이번 영화를 작업하면서 ‘내가 이래서 영화를 사랑하지’라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나.
어느 날 최국희 감독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난 영화가 생물이라고 생각해. 영화는 살아 있는 거야. 그래서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고 매 순간 살아 있는 무언가를 마주할 수 있는 거야.” 마지막 촬영을 마쳤을 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내가 박태영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너를 그렇게 내버려두는 거였어.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건 안아주는 것밖에 없었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안다. 너의 생명력을 깎아서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울컥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연결된 순간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