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번 참가자, 탈락입니다. 눈 감으셨습니다.” 오래전 나도 ‘피지컬’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 대회로 말할 것 같으면, 시네필들의 지구력과 눈꺼풀 근력을 시험했던 ‘영화 오래 보기 대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엄청난 피지컬 대회이자 멘털 대회였다. 눈꺼풀이 얼마나 천근만근이던지. 피지컬과는 무관하게 산 지 40여년. 신체를 갈고닦는 대신 정신을 갈고닦았고, 정신을 갈고닦는 대신 글을 갈고닦았다. 글을 갈고닦는 대신… 아무튼 계속 갈고닦았다. 피지컬만 빼고. 그런데 <피지컬: 100>의 원고 청탁이라니. 최약체를 향한 도발인가, 아니면 생활체육인으로 인정받은 것인 가(최근 풋살을 시작했다), 그도 아니면 스포츠 애호가로서의 구력을 인정받은 것인가. 어쨌든 나는 나와는 너무도 이질적인 몸을 가진 참가 자들의 대결에서 평생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피지컬의 신세계를 본다. <피지컬: 100>이 거대한 삶의 격전장이라는 사실에 흥분하고 감동 한다.
마침 넷플릭스 계정에서 <피지컬: 100>의 이탈리아 편과 멕시코 편이 ‘나를 봐줘’ 하며 손짓하고 있다. 세계의 시청자들이 한국에서 만든 피지컬 게임에 열광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 하나는 <피지컬: 100>이 스포츠 콘텐 츠로서의 재미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거창한 서사가 없다. 얻어맞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계획을 가진 힘 좀 쓰는 몸들이 쉼없이 부딪히고, 육체적 · 정신적 한계에 다다른 참가자들은 1초라도 더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거기에는 정직한 몸의 고투가 있다. 패배를 변명하지 않고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참가자들을 보며 가슴이 뛰는 건 한국 사람이나 멕시코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몸의 언어에는 번역이 필요 없다.
<피지컬: 100>은 ‘완벽한 몸’을 탐구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나이, 성별, 인종, 체급을 불문하고 모인 100명이 벌이는 완벽한 피지컬에 관한 실험. 올림픽 메달리스트부터 운동 유튜버, 보디빌더, 경찰, 크로스핏 선수, 모델, 배우까지 참가자의 면면도 다양하다. 첫 등장에선 비현실적인 근육과 덩치가 압도적인 인상을 남기지만 매달리고, 버티고, 끌고, 들고, 달리는 퀘스트가 이어질수록 ‘보이는 몸’과 ‘사용되는 몸’의 차이가 드러난다. 피지컬을 결정하는 것은 근력만이 아니다. 지구력과 순발력, 기술과 밸런스, 정신력과 팀워크까지 모두 필요하다. 그래서 큰 몸이 반드시 강한 몸은 아니고, 젊은 몸이 반드시 오래 버티는 몸도 아니다. 참가자들이 세워둔 계획과 호언장담은 새로운 퀘스트가 시작될 때마다 깨진다. 예상치 못한 대진과 부상, 단체전의 변수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진짜 게임은 계획이 어긋난 순간부터 시작된다.
개인전과 단체전은 또 다르다. ‘나의 강함’을 증명하면 되는 개인전과 달리 단체전에 서는 ‘우리의 생존’을 고민해야 한다. 누가 힘을 쓰고, 누가 양보하고, 누가 희생할 것인지 결정 해야 한다. 협력과 전략, 운동능력과 운동지능, 리더십과 역할분담이 모두 필요해진다. 개인의 피지컬을 겨루던 프로그램은 어느 순간 사회의 축소판이 되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을 시험한다. 혼자 강한 사람에서 함께 강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미션이 된다.
그 과정에서 ‘강함’의 정의도 끊임없이 뒤바뀐다. 시즌1에선 10개의 팀이 만들어졌다. 그중 여성 팀장은 전 레슬링 국가대표 장은실이 유일했고, 세명의 여성과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은 남성들로 구성된 이 팀은 최약체로 여겨졌다. 하지만 무시와 편견의 무덤에서 피어난 건 악과 깡이었고, 악과 깡은 퀀텀점프 같은 마법을 부렸다. 언더도그의 반란이었다. 패자부활전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도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시즌2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의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정지현이 거구들을 제압하며 피지컬의 공식에 균열을 냈다. 전성기를 지난 ‘아저씨’ 추성훈의 활약(“아조씨 무시하지 마!”)과, 젠더리스 게임의 스릴을 한껏 끌어올린 여성 참가자들의 패기는 무하마드 알리의 명언을 떠올리게 했다. “불가능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피지컬: 100>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승자가 결정되는 순간이 아니다. 무한의 시간 동안 바위를 들고 서 있거나 상대가 나가 떨어질 때까지 바위를 굴리는 게임에서 참가자 들은 극한의 고통과 유혹을 마주한다. ‘여기서 그만둘까?’ ‘여기서 포기할까?’ 그 순간 그들이 싸우는 대상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삶도 그렇다.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시 포스처럼 인간은 계속 무언가를 버텨야 한다. 일도, 관계도, 나이도, 몸도. <피지컬: 100>은 그것을 원시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자기 몸의 무게와 삶의 형벌을 견뎌내는 과정이 곧 인생이라고.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이 자주 외쳤던 말은 “조금만 더 버텨”와 “끝까지 포기하지 마”다. 경쟁 프로그램이지만 응원은 우리 팀과 상대 팀을 가리지 않는다. 어느 순간 경쟁 구도는 사라지고, 버티고 힘쓰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존경이 남는다.
프로그램에서 “해냈다”는 말은 승리했다는 뜻보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았다. 후회 없는 최선이 빚어낸 결과라면 그것이 패배와 탈락일지라도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으로 빛난다. 어쩌면 <피지컬: 100>이 세계의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몸 하나를 가지고 살아가고, 그 몸으로 자기 인생의 퀘스트를 통과하고 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국경을 넘어 공감을 얻은 것은 단순히 압도적인 스펙터클 때문은 아닐 것이다. 시즌1은 한국 예능 최초로 넷플릭스 글로벌 비영어 TV 부문 1 위에 올랐고, 82개국에서 톱10에 진입했다. 시즌2 역시 87개국에서 톱10에 오르며 열기를 이어갔다. <피지컬: 아시아> 방영 이후 한국, 일본, 태국 등에서 하이록스(달리기와 기능성 종목을 결합한 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증가한 것도 프로그램의 글로벌 영향력을 보여 준다. 이제 <피지컬: 100>의 세계관은 한국을 넘어 멕시코, 이탈리아 등 각국의 참가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강함’을 증명하는 단계로 확장되고 있다. 그 성공은 단순히 K문화의 인기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피지컬의 신세계를 시각화한 스펙터클과 자신의 한계를 넘어 저마다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사람들에 대한 열광이 만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다시, 완벽한 몸이란 무엇인가? 100개의 몸을 모아놓고 하나의 완벽한 몸을 찾으려 했지만 게임이 진행될수록 드러난 것은 오히려 100가지의 능력치였다. 완벽한 피지컬에 대한 지금까지의 실험을 바탕으로 귀납적 추론을 해보면, 완벽한 몸은 없다. 저마다의 삶을 견디는 몸이 있을 뿐이다. 100개의 몸에는 100개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그 몸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