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이 뒤집혔다. 넷플릭스는 한국 콘텐츠산업의 많은 풍경을 바꾸었다. 불과 10년도채 걸리지 않았다. 투자부터 공개까지 콘텐츠 제작의 모든 과정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넷플릭스의 등장으로 영화, 드라마, 예능 등 모든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각각의 장르보다 콘텐츠라는 말이 더 익숙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제작 환경도 변화했다. 특히 시리즈의 경우, 기존 드라마와 영화의 제작 방식이 뒤섞였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을 제작해 에미상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로 6관왕을 차지한 김지연 퍼스트맨스튜디오 대표는 “시리즈의 경우, 작품의 특성, 작가, 감독, 제작사의 성향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넷플릭스뿐만 아니라 플랫폼의 시리즈물(기존의 채널용 드라마가 아닌) 제작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업계에서는 기존의 방송 인력과 영화 인력이 크리에이티브 영역부터 피지컬 프로덕션까지 섞인 게 큰 변화인 것 같다”며 “영화감독이나 작가가 시리즈를 쓰거나 연출하고, 영화감독이 방송작가가 쓴 대본을 연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경계가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갈등이나 혼선이 종종 빚어지긴 하지만, 지금은 모든 장르의 경계가 콘텐츠라는 말로 융합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필연적인 방향이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더 나은 창작 결정을 위한 고려사항들
영화든 드라마든 기획이 과감하고 수위가 높아도 투자가 가능해졌다. 기존의 영화 투자와 방송사 편성 기준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소재의 콘텐츠도 넷플릭스에선 만들어질 수 있게 됐다.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감독 김용훈, 2023)을 제작한 손상범 하우스 오브 임프레션 대표는 “<마스크걸>은 일반 방송사에선 편성이 어려운 소재였다”며 “프로듀서 입장에서 기획할수 있는 소재의 범위와 수위가 넓어진 덕분에 좀더 차별성 있는 기획을 시도할 수 있게 됐다. ‘넷플’스럽다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만큼 독특하고 개성 강한 작품이 많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 포맷 또한 기존의 16부작을 고집할 필요 없이 작품 성격과 길이에 맞게 6부작, 8부작, 10부작 등 다양하게 결정할 수 있다는 점도 자유롭다”고 덧붙였다. 기획의 스펙트럼이 더넓어지고, 포맷 또한 작품의 성격에 맞게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양한 소재와 수위는 제작자와 시청자 모두에게 환영할 만한 일이다. 넷플릭스 영화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감독 김태준, 2022)와 <84제곱미터>(감독 김태준, 2025)를 제작한 서종해 영화사 미지 대표는 “기존의 극장 개봉 영화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쉽지 않은 기획이 있는데, 프로듀서 입장에선 넷플릭스라는 강력한 플랫폼을 선택할수 있는 옵션이 하나 더 생겼다는 점에서 기획이 가진 리스크를 상쇄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예산으로 애초의 기획을 흔들림 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점도 프로 듀서로선 매력적이다. 서 대표는 “50억~70억원 규모의 장르영화의 경우, 메인 투자 배급사에 어필하기 위해 예산을 줄이기도 하고, 창투 사를 돌아다니면서 원래 목표로 한 배우급도 낮아지면서 20억~30억원대 영화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다”며 “<84제곱미터>는 투자 허들이 높은 소재와 기획인데,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으면서 완성도 높은 아파트 세트를 준비하고, 좋은 배우를 캐스팅해서 흥행 부담 없이 신인감독의 재능과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고 만족해했다.
이종필 감독이 연출한 <파반느>(2024)도 처음에 극장 영화로 진행됐다가 넷플릭스의 제안을 받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다. 이종필 감독은 “<파반느>는 극장 영화로 투자를 받는 과정에서 ‘흥행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우여곡절이 많았다”며 “그럼에도 메인 투자 배급사였던 플러스엠이 시도해보자고 진행한 덕분에 촬영에 들어갔지만, 촬영을 거쳐 후반작업을 하면서도 흥행에 대한 강박이 컸다”고 밝혔다. 이 감독은 “넷플릭스가 제안 하고서야 비로소 흥행에 대한 압박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게 연출자로서 일반 극장 영화와의 가장 큰 차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D.P.>와 <푸른길>을 연출한 한준희 감독 또한 “작업 과정은 극장 영화와 넷플릭스 시리즈 모두 크게 다르진 않지만, 시리즈를 작업하면서는 더 긴 호흡으로 많은 캐릭터를 골고루 할애하면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제 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가능한 사랑>의 이창동 감독이 “넷플릭스가 감독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줄곧 같은 자세를 견지해준 덕분에 지금까지 영화를 제작한 것보다 가장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말한 것도 창작자로서의 자유가 보장되고, 흥행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난다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는 모든 회차를 한번에 공개하는 방식이기에 사전제작으로 진행된다는 점도 큰 변화다. 영화산업은 2000년대 초중반부터 이미 산업화가 이루어져 투자부터 정산까지 모든 공정이 투명하고 체계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매일 쪽대본이 나오고, 방영과 실시간으로 밤샘 촬영을 하며 납품하는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제작 환경을 고려하면 천지개벽이라 할 만하다. 넷플릭스 <킹덤: 아신전>을 제작한 장원석 BA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이것은 드라마도 영화처럼 체계적인 제작 관리 시스템이 도입된 덕분”이라며 “넷플릭스의 거의 모든 시스템은 이미 할리우드에서 적용하고 있는 매뉴얼을 한국적으로 접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넷플릭스 제작 관리 매뉴얼은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는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사와 제작 실무진을 위한 포괄적인 가이드라인이다.
이것은 콘텐츠 및 정보 보안, 촬영 및 카메라 사양, 데이터 및 프로덕션 자산 관리, 생성형 AI 활용 지침 등 모든 공정의 규정과 넷플릭스 전용 저작 툴 활용법이 담겼다. 제작 관리 매뉴얼 덕분에 드라마도 영화처럼 제작 진행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됐다. 넷플릭스 영화 <모럴센스>(감독 박현진, 2022), <길복순>(감독 변성현, 2023)을 제작한 이진희 씨앗필름 대표는 “넷플릭스가 제작 일정과 작품 퀄리티를 더욱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운용하는 점”을 주목했다. 이진희 대표는 “제작 시스템에 있어서 기존에는 투자사가 작품을 결정하면 제작사가 주어진 예산 내에서 제작 전반을 관리했다면, 넷플릭스는 소싱, 예산·프로덕션, 후반, VFX 등 공정별 담당자들이 프리프로덕션부터 참여해 진행 상황과 퀄리 티를 함께 체크한다”고 설명했다. 그것이 제작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공정별 담당자와 논의하는 시스템이다. 김지연 대표 또한 “크리에이티브, 예산, 프로덕션 관리, 음악, 법률 자문, 홍보 마케팅 등 제작에 필요한 모든 파트가 담당 팀으로 나뉘어 있어 같이 일하기에 수월한 면이 많다”고 말했다.
여러 공정 중에서도 포스트프로덕션의 제작 관리 매뉴얼은 창작자가 의도한 퀄리티를 끝까지 구현할 수 있도록 제작 과정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선택할 시간과 환경을 만들고자 한다. 넷플릭스는 UHD, HDR, 돌비애트모스 등 높은 사양을 도입했기 때문에 촬영 컨셉부터 컬러, 편집, 사운드, 최종 마스터링까지 전공정에서 어느 한 단계도 따로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 자막, 더빙, 품질 관리(QC)를 거쳐 여러 언어로 전 세계에 공개되는 것도 미리 고려해야 한다. 넷플릭스 담당자는 “그래서 초기부터 제작사와 기술 기준, 워크플로, 일정, 주요 마일스톤을 함께 논의한다. 규칙을 지키는 것보다 준비를 통해 후반에 더 나은 퀄리티와 창작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덧붙였다.
#@008#@넷플릭스 포스트프로덕션에서 강조하는 슬로건은 ‘FIX IN PRE’이다. 쉽게 말하면 후반에 고치지 말고, 고칠 일을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과제를 프리프로덕션에서 해결하자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넷플릭스 담당자는 “후반작업에서 문제가 될 부분을 초기에 발견해 제작사와 필요한 결정을 빨리 하자는 뜻”이라며 “그래야 후반작업에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드는 시간을 줄이고 편집, VFX, 사운드, 색보정 등에 창작자가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작 관리 가이드라인은 프리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프로덕션의 각 단계에서 무엇을 확인하고, 논의하고, 결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제공한다. 넷플릭스의 또 다른 담당자도 “공정마다 결정할 사항과 이해관계자가 함께 논의할 사항을 초반부터 다룰 수 있도록 체크리스트를 두고 있다. 쇼마다 다르지만 VFX 비중이 큰 작품의 경우 세부 항목까지 미리 상의한다”며 “초기부터 전체 스태프가 같은 그림을 보고 각자의 분야에서 준비하고, 촬영 현장에서 원하는 영상을 최대한 담을 수 있도록 준비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고치면 늦는다
실제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를 작업했던 VFX 업체들도 포스트프로덕션 공정에서 제작 관리 매뉴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킹덤>을 시작으로 <좋아하면 울리는> <마스크걸> <도적: 칼의 소리> <악연> 등 많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의 VFX를 작업한 매드맨포스트의 안재곤 본부장은 “드라마 한회가 영화 한편에 가까운 밀도를 갖게 되면서 VFX의 역할도 촬영 후 단순히 CG를 제작하는 것을 넘어서 전체 제작 과정에 참여해 작품의 비주얼을 함께 설계하는 영역으로 확대됐 다”고 설명했다. 안 본부장은 “기존 드라마에서 시도하지 못했던 다양한 소재와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해 보다 과감하게 CG를 설계하고 새로운 시도에 도전하며, VP(버추얼 프로덕션)와 AI를 활용한 영상 제작 등 최신 기술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됐다”며 “이같은 변화에 맞춰 4K 대용량 데이터를 관리하기 위한 제작 파이 프라인과 QC 시스템도 함께 고도화됐다”고 덧붙였다.
그간 드라마 속 VFX의 완성도가 아쉬웠던 건 시간에 쫓겨서 작업해서다. 많은 후반 작업 공정이 그렇듯이 말이다. 안 본부장의 말대로 넷플릭스 콘텐츠의 VFX는 작품 전체의 비주얼을 설계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상당한 작업시간이 주어진다. 넷플릭스 시리즈 <스위트홈>(감독 이응복, 2020), <고요의 바다> (감독 최항용, 2021)의 VFX를 맡았던 손승현 웨스트월드 대표는 “<스위트홈>은 크리처 캐릭터가 표정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연기를 했다는 점에서 도전적인 프로젝트였다”며 “모든 크리처 캐릭터를 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 넷플릭스가 프리프로덕션 시간만 8개월이나 줬다.
작업시간이 충분하게 주어져서 메인 크리처 캐릭터를 촬영 들어가기 전에 다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할리우드처럼 충분한 시간에 걸쳐 준비한 덕분에 완성도 높은 크리처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크리처 캐릭터는 실시간 엔진을 기반으로 한 버추얼 프로덕션 기술과 결합하면서 실감나는 움직임을 선보일 수 있었다. <스위트홈>은 이후 <고요의 바다>의 VFX를 작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고요의 바다>는 LED 월과 언리얼 엔진을 본격적으로 결합한 ICVFX 촬영으로 진행한 국내 첫 작품이다.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VFX 작업이 차지 하는 역할이 커진 만큼 VFX 스튜디오간의 협업 체계도 확대됐다. 한 VFX 스튜디오가 작품 전체의 VFX를 도맡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여러 업체가 협업하는 사례가 늘었다. 안재곤 본부장은 “메인 VFX 스튜디오가 작품의 비주얼을 설계하고 CG 결과물의 품질 관리를 담당하며, 각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국내외 VFX 스튜디오와 협업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며 “이렇게 함으로써 각 스튜디오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동시에 높은 VFX 완성도와 제작 일정 모두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힘
무엇보다 한국에서 만든 콘텐츠가 전 세계에 동시 공개돼 해외 시청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새롭다. 이진희 대표는 “과거에는 영화든 드라마든 국내에서 흥행하거나 인기를 얻은 뒤 해외 세일즈사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 선보였다면, 지금은 190여개국에 공개됨과 동시에 전 세계의 반응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고 전했다. 배우들이 넷플릭스 콘텐츠에 출연하길 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매니지먼트사 대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든 넷플릭스 프리바이(채널에서 제작하는 드라마를 넷플릭스에서 동시에 트는 포맷) 콘텐츠든 해외에서 동시 공개되다 보니 해외 시청자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얼굴을 알리는 데 도움이 돼서 넷플릭스 공개를 원하는 배우들이 많다”고 전했다. 어쨌거나 넷플릭스만의 전 세계 동시 공개는 <오징어 게임> 같은 글로벌 히트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기반이자 새로운 K콘텐츠 바람이 불게 된동력이 됐다.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은 콘텐츠산업의 많은 변화를 끌어냈으며 산업생태계도 덩달아 확장됐다. 개성이 강한 콘텐츠와 재능 있는 신인 창작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이런 기대와 변화만큼이나 여러 과제도 남겼다. K콘텐츠 산업이 외연 확장과 함께 공정하고 안정적인 생태계를 지켜나가는 건, 산업의 리딩 플랫폼인 넷플릭스의 다음 선택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