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집] BEST 10 <더 글로리> - 발굴되어 발광하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가해자들에게 보복한다. 익숙한 사적제재 드라마의 줄거리다. 그럼에도 <더 글로리>에서 기시감보다 생동감을 느꼈다면, 먼저 그 공을 김은숙 작가에게 돌려야 한다. 인간사를 예민하게 포착해온 로맨스의 귀재가 사랑이 아닌 원한으로 안테나를 뻗은 결과, 악연의 밀도가 여느 복수극보다 빽빽하게 구현되었다. 이를 아낌없이 체화한 연기자들이 이름을 알리고, 차기작을 만나고, 넷플릭스 안팎을 누비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더 글로리>를 첫 OTT 출연작으로 택한 스타 송혜교를 필두로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얼굴을 각인시킨 배우들의 활기찬 행보는 이 작품이 남긴 최고의 족적이라 할 만하다.

송혜교

<더 글로리>의 주인공 문동은은 칙칙함과 단정함 사이를 능란하게 오간다. 적들 앞에서는 그림자를 자처하며 악담을 쏟고, 구슬려야 할 자들 앞에서는 말끔한 표정을 짓는다. 청춘의 빛을 앗아간 이들을 벌하기 위해 단련한 기술이다. 배우 송혜교는 그 종이 한장 차이를 조절해가며 동은을 입체적으로 조각했다. 극적인 멜로드라마들로 다져온 필모그래피에 의외의 정점을 새긴 베테랑은 22부작에 달하는 시대극 <천천히 강렬하게>로 넷플릭스에 복귀한다. 노희경 작가와 재회한 그를 다시 한번 낯설게 마주할 날이 머지않았다.

염혜란

동은의 오른팔 김현남은 가정폭력 생존자로서 연민을 자아내는 동시에 이중간첩 노릇을 할 정도로 주도면밀하다. 누구보다 처절하게 누아르의 감정선을 소화한 “명랑한 년”은 염혜란의 몸을 입고 현실감을 얻었다. 같은 배우가 또 다른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에서 분한 인물은 현남의 광기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팽창시킨 것만 같아 더 흥미롭다. <더 글로리>로 배우 염혜란을 처음 인지한 시청자는 드물겠지만, <더 글로리>처럼 그의 이미지를 전방위적으로 활용해낸 작품을 꼽기는 어려울 것이다.

임지연

임지연의 연기 인생은 <더 글로리> 이전과 이후로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대의 악인 박연진이 매회 핏대를 세우며 열연한 배우에게만큼은 더없는 영광을 안겼다. 임지연은 박연진의 흔적을 지우기보다 그 이면과 정면을 영리하게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 <옥씨부인전> <멋진 신세계> 등을 선보였다. 미움받을 용기를 디폴트값으로 지닌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그 덕분에 한뼘 넓어졌다.

정성일

연극, 뮤지컬 무대에서 인지도를 쌓아온 배우 정성일은 <더 글로리>를 통해 굉장한 별명을 선물받았다. “나이스한 개새끼”라는, 박연진의 남편 하도영을 설명할 때 반드시 따라붙는 수식어가 그것이다. 즉 도영은 속을 알 수 없는 친절로 상대를 헷갈리게 하다가도 냉정해져야 할 때만큼은 분명히 아는 남자다. 꺼림직한 강단을 적확하게 묘사한 역량은 영화 <전, 란>에서 조선을 정벌하는 다이묘 역으로, <살인자 리포트>에서 연쇄살인마 역으로도 너끈히 발휘되었다.

차주영

<더 글로리> 속 학교폭력은 넉넉한 집안의 자녀들이 배경을 믿고 저지른 악행처럼 비친다. 무리에 섞여 있던 최혜정이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배우 차주영이 형상화한 혜정은 결핍을 숨기려 치장하다가 헛발질을 거듭하는데, 그게 우스꽝스럽다가도 안타까워 눈에 밟히는 묘한 매력을 발휘한다. 우아하게 팬들을 환대하는 본체의 모습과 대비돼 시간이 흐를수록 연기력이 재평가받고 있다. 생애 첫 타이틀롤을 맡은 드라마 <원경>, 독특한 음색으로 욕망을 말한 드라마 <클라이맥스>도 차주영의 진가를 밝혔다.

박성훈

영화 <곤지암>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드라마 <출사표>에서 처음 주연으로 나서는 등 서서히 성장곡선을 그리던 배우 박성훈의 커리어는 <더 글로리>를 만나 만개했다. 콤플렉스에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미성숙함, 놓쳐온 것을 이제라도 가져보려는 간절함, 어떻게 왔냐는 물음에 “차 타고 왔다”고 응수하는 기막힘을 적절히 배합해 한없이 가벼운 빌런 전재준을 표현한 그는 또다른 넷플릭스의 메가 히트작 <오징어 게임> 시즌2, 3에서 전재준을 완벽히 탈피해 놀라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김건우

넷플릭스 시리즈 <좋아하면 울리는> 시즌1에서 목소리와 실루엣만으로 짧게 등장한 배우 김건우가 <더 글로리>의 손명오 역으로 넷플릭스 화면을 장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3년이다. 시청자는 손명오가 비릿하게 눈을 반짝일 때마다 긴장했고, 지저분한 욕설을 뱉을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김건우는 또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은중과 상연>에서 전혀 다른 캐릭터로 변신해 넷플릭스의 문을 두드렸다. 이해할 여지없이 단순한 악역과 이해의 폭이 커서 복잡한 배역 모두에 인간미를 불어넣는 것이 그의 강점이라는 것을 널리 알린 여정이었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