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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동트기 전 그네에 앉은 그 남자는 - <진공인간> 현장과 봉준영 감독 인터뷰

새벽 4시, 성산동 아파트 단지 앞의 놀이터. 검은 옷을 입은 수상한 이들이 검은 승합차에서 내리더니 분주하게 장비를 실어 나른다. 놀이터에 미리 도착해 그네 주변을 서성이며 그네를 타보기도 하고 에어 복싱도 해보며 동선을 체크하던 수상한 2인조가 장비 차량을 반긴다. <페이시스: 조성하 프로젝트> 중 <진공인간>의 봉준영 감독, 정그림 촬영감독이다. 손발을 맞춘 지 얼마 안된 소수의 멤버지만 조용한 새벽녘 어둠을 틈타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카메라 자리를 잡는다. 동트기 전에 모든 촬영을 마쳐야 한다. 놀이터에서 천성(조성하)이 초등학교 친구 진국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통을 받는 신만 찍으면 되지만 이 한통의 전화로 인생이 바뀌게 되므로 영화에 전환점이 되는 신이다.

봉준영 감독의 <진공인간>은 판타지적 설정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대학생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자 문구점 사장인 천성은 어느 날초등학교 동창에게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의 나이 50대이니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 이름도 가물가물하건만 상대는 다짜고짜 자신에게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더니 “너의 1시간을 천만원에 사겠다”며 대신 허공에 대고 사람을 죽이는 ‘척’만 해주면 된다고 제안해온다. 1시간 동안 살인 청부업자가 되어 진공인간을 죽이는 현장을 찍어 보내주면 천만원을 준다는 솔깃한 제안. 누구도 다치지 않고 그저 죽이는 척 허공에 칼질 연기를 하면 된다는 제안을 받는다면, 누구나 귀가 번쩍 뜨이지 않을까. 바로 이 마음이 동하는 제안을 받는 통화 장면을 깊은 새벽에 놀이터에서 촬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에서 모니터에 잡히는 배우는 오직 배우 조성하뿐이다. 진국 역할의 목소리는 배우 조한철이 맡았는데, 친분이 깊은 조성하 배우가 직접 섭외했다. 목소리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며 황당무계한 ‘진공살인’을 교사하는 인물이라 비열함과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필요했고, 거기에 조한철 배우가 적격이었다.

간단한 요깃거리가 든 비닐봉투를 들고 놀이터로 온 남자, 그네에 털썩 앉더니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그네를 작게 움직인다. 다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평범한 일상을 얘기하다가, ‘살인’이라는 예상치 못한 단어를 듣고 화들짝 놀라는 중년 남성의 대사. 하나의 장면에 불과하지만 긴 대사를 여러 번반복하며 연기하는 배우로선 쉽지 않은 장면. 날씨는 초가을이지만 새벽이 되자 급격히 떨어진 온도로 얼굴이 얼얼하다. 카메라앵글을 여러 번 바꾸느라 대사를 반복하는 조성하 배우도, 상대편 대사를 전화로 읽어주는 스태프도 지친 기색이다. “시간? 시간을 사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 “1시간 동안 너는 킬러가 되고 임무를 수행하면 돼.” “킬러라면, 사람을 죽이라는 거냐? 진국아, 오랜만에 전화해서 이게 무슨 장난이야.” 전화를 끊고 먹던 소시지를 칼자루처럼 쥔 남자가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두르는 흉내를 내고 이내 멋쩍게 다시 소시지를 입에 무는 장면까지. 어둑한 장소에서 긴 대사와 함께 작은 움직임과 좁은 동선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데까지. 같은 장면을 바스트숏으로, 그 다음은 흔들리는 천성의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그리고 진공인간을 표현한 긴 그림자까지 롱숏으로. 정그림 촬영감독은 카메라 위치를 여러 번 조정하고 그때마다 모니터 뒤로 스태프들이 함께 자리를 이동한다.

어느덧 차츰 밝아오고, 오전 6시가 가까워지자 새벽 운동을 하러 놀이터 부근으로 나온 주민들이 촬영팀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자 봉준영 감독의 마음은 다급하다. 조성하 배우는 <진공인간>의 캐릭터가 이론적으로 추측할 수 없어서 더 재미있게 다가왔다고 말한다. “상상력으로 쫓아가야 하는 인물이라 사실 그 부분이 가장 어려우면서 또 색다른 점이었다.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리액션 없이 찍는 게 어렵다. 혼자 다 하는 장면이라 답답하지만잘 끝난 것 같아 다행”이라며 동이 튼 아침에 졸린 눈을 부비며 말했다. 그가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유는 명확했다. “배우도 그렇지만 신인감독들도 작품 들어가기가 워낙 어려운 시기다. 우리가 아이디어를 살려 의기투합해보자 해서 시작한 프로젝트다. 아무래도 감독들의 대본에서 기성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아이디어와 신선함, 도전 같은 것이 느껴져 배우로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연극적인 소재를 사실주의적으로 - <개와 인간의 대화> 연제광 감독 인터뷰

조성하 배우 뒤에 서 있는 연제광 감독이 앉아 있는 이원 배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 이방인필름

- 연출하는 <개와 인간의 대화>는 블랙코미디 겸 사회드라마 장르라고 들었다.

재개발 담당 공무원 로만수(조성하)가 재개발 지역의 텅 빈 골목을 걸어가다가 방치된 개 한 마리와 마주친다. 그리고 개에게 취중고백을 한다. 허세로 시작한 얘기는 점점 로만수가 저지른 일로 향해간다. 캐릭터는 딱 둘이다. 로만수와 개. 실제 개를 데리고 촬영하지 않고, 댄스크루 ‘저스트절크’의 원년 멤버인 이원 배우가 사실주의적으로 개 연기를 했다.

- 체호프 단편 중 <개와 인간의 대화>를 조성하 배우와 연결한 까닭은.

1885년에 쓰였지만 지금 내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주제의식을 가진 단편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인데, 10년간 극단 생활을 할 때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 적 있다. 조성하 선배의 얼굴을 재밌고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서사라 봤다.

- 현장에서 발견한 의외의 순간이 있었다면.

지금은 사라진 충남 천안의 재개발구역에서 촬영했다. 카메라를 세팅할 때 그 골목에서 5대째 살았다는 할머니가 나타나 이곳의 흥망성쇠를 알려주셔서참 재밌었다. 그리고 로만수가 개를 처음 마주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그곳에 사는 길냥이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등장했다 퇴장했다. (웃음) 길냥이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편집에서도 살렸다. 로만수가 개와 대화하다 감정을 폭발하는 장면에서는 가로등의 넝쿨이 산들바람에 움직여 할레이션까지 생겼다. 그리고 이원 배우가 너무 ‘개같이’ 연기를 잘했다. 그가 짖으면 멀리 있던 개가 반응할 정도였다.

- 작품마다 화면비가 다르다고 들었다.

<개와 인간의 대화>는 한상길 촬영감독과 함께 화면비 4:3에 흑백으로 촬영했다. 193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들에 착안해서 텅스텐 조명을 써서 콘트라스트를 강하게 표현했다. 요즘 LED 조명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면 텅스텐 조명은 하드하고 선이 선명하게 떨어졌다. 그 강렬한 느낌이 좋았다.

- 결과물을 언제 볼 수 있을까.

현재 세편 다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이다. 세 연출자의 작품을 어떤 순서로 보여줄지 결정하지 않았고 완성본을 보고 결정하려고 한다. 내년 공개를 예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