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자국 없는 몰티즈’, ‘윤종신이 임시보호하고 김은희가 입양한 남자’. 영화감독의 수식어치고 권위 없는 장항준의 별명은 대중적으로 인식된 그의 무해함을 입증한다. 많은 사람들은 장항준의 유머러스함과 친밀함을 좋아하지만, 정확히는 무해할 수 있는(혹은 장난기 높은 별명을 불편함 없이 사랑스러운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적임’이야말로 그가 너른 사랑을 받는 가장 큰 이유다. 어쩌면 그가 단종의 비극을 영화로 풀어낸다는 소식에 그 기대감이 높아진 이유도, 그가 인간의 보편적 정서, 슬픔과 연민, 동정과 비수를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해사한 웃음과 낙천적인 목소리 사이로 인간 본연의 비탄을 잘 이해하는 사람. 역사적 기록을 한 꺼풀 벗겨내 그 안에 서린 감정의 두께를 감지하는 사람. 길었던 2025년을 건너 도래하는 2026년 2월에는 장항준이 완성한 비극의 목소리 <왕과 사는 남자>가 온다.
- 중간중간 현장 사진이 공개될 때마다 온라인 반응이 들썩였다. “국사책에 실린 사진” 같다고.
느낌 좋다는 반응을 많이 들었다. (웃음) 대부분의 사극이 궁궐을 배경으로 한다면 <왕과 사는 남자>는 오히려 궁궐 밖에서 이야기가 이뤄진다. 실제 로케이션은 영월, 문경 등 국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본래 이야기 무대는 영월의 청령포인데 지금은 완전히 관광지가 되어버려서 최대한 유사한 모습으로 다시 구현했다.
- 제작발표회에서 <왕과 사는 남자>의 감독을 맡게 된 경위로 김은희 작가의 추천을 꼽았다. “잘나가는 사람 말을 듣게 된다”고 유머러스하게 답했지만 진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2년 전 처음 시나리오를 제안받았을 때 시장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극이 투자받기 어려울 거라 판단해서 제작자에게 거절을 하러 미팅 자리에 나갔다. 전화로도 거절할 수 있지만 자리에 나간다는 건 그만큼 시나리오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제작자를 만나 시나리오가 나아갈 방향을 이야기했더니 너무 좋아해주시더라. 감독님이 할 수 있는데 왜 안 하느냐고. 극장에 상영될 영화가 이제 없어지고 있다고. 그때 마음이 흔들렸다. 집에 가서 김은희 작가님에게 마지막 결정을 논의했는데 내 수정 방향을 듣고 좋아하더라. 사실 ‘역사가 스포’라는 말처럼 처음에는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구성하는 게 부담됐다. 하지만 <서울의 봄>을 봐라. (웃음) 역사적 애통함이나 좌절을 모두가 알고 있더라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이끌어내면 많은 사람들이 몰입한다. 역사적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서울의 봄>을 보고 많이 배웠다. 김성수 감독에게 이 말을 전했더니 되게 좋아하더라. (웃음)
- 황석구 작가와 함께 각본에 이름을 올렸다. 긴 이야기 중에서 연출 욕구를 자극했던 요소는 무엇인가.
마지막 장면. 단종의 비극적 최후가 각본 안에 구슬프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 신 하나만으로 영화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비극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과정을 켜켜이 쌓아가는 게 가장 중요했다. 두 시간 남짓 동안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터놓고 가까워지다가 결국 모든 순간을 함께하는. 그 빌드업이 탄탄하지 않으면 이야기 전체의 가치가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에 가장 공들였다. 실제로 단종의 최후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많은 미디어도 단종이 왕위를 뺏길 때까지만 관심을 갖다가 이후에 ‘죽었다더라’로 귀결된다. 그 물음표를 채워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만약 내게 계유정난을 또 하라고 하면 안 했을 거다. 이미 다른 영화들이 잘 다뤄줬는데.
- 장항준과 사극. 다소 낯선 조합으로 보인다.
친구가 그러더라. “근데 너 사극 해본 적 없잖아. 괜찮겠어?” 그래서 그 말 듣자마자 답했다. “그럼 넌 조선시대 살아봐서 말하냐?”
- 단종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순간 그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과 관점이 중요해진다.
단종은 어떤 왕이었을까. 그 고민을 많이 했다. 왕위에 오른 뒤 그는 거의 기를 못 폈다. 그런데 사료를 찾아보면 초반에는 무언가를 해보려고 꽤 시도했더라. 단종은 조선시대 찾아보기 힘든 적통에 세종이 가장 사랑했던 자손 중 하나다. 그만큼 똑똑하고 활쏘기도 잘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작품에서 보여진 단종의 나약한 이미지는 실제 그 사람의 성향과 상관없이 해석된 것일 수 있겠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규정해버린 거다. 나약할 거라고. 그렇지만 12살짜리 아이가 강인해봤자 얼마나 강인할 것이며, 나약해봤자 얼마나 나약할까. 그 나이대의 소년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때부터 단종에 대한 렌즈를 갈아 끼우고 바라봤다. 영특하고 강인한 소년이 왕이 됐지만 곧 왕좌를 빼앗겼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 그때 유배지의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면 단종은 진짜 백성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사대부 위주의 조선이 아닌, 백성 중심의 조선을 꿈꾸는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가 계속해 왕위를 이끌었다면 세종 이후 최대 성군이 되지 않았을까. 계속해 역사적 상상을 이어나갔다.
- 주요 배경이 궁중이면 넓은 궁의 전경으로 미술을 눙칠 수 있는 요령이 있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백성들의 일상이 담긴 마을이 중심 배경이다. 미술적으로도 많은 미션이 있었을 텐데.
이번에 배정윤 미술감독이 정말 많이 고생했다. 쉽게 계산하지 않고 늘 발로 뛰는 디테일한 감독님이다. 한번은 강가에 나루를 지어서 김은희 작가와 우리 딸이 놀러온 적이 있다. 수위에 따라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때 미술팀이 뭔가를 막 만들고 있더라. 그게 새 둥지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된 나무집이면 새 둥지가 있을 거라면서. 그것도 사각지대에. 그런 디테일이 하나하나 살아 있다.
- 예고편이 공개되고 단종의 운명을 아는 이들은 벌써부터 슬픔을 공유한다. 그 비수는 단연 박지훈 배우의 눈빛에서 비롯한다.
왜 이렇게 처연한지…. 마지막으로 편집까지 다 끝내고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박지훈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나.’ 소년미 안에 군주로서의 성정이 보이는 게 무척 중요했는데 박지훈 배우가 그랬다.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좌절, 우울과 그림자가 눈 안에 있다.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도 다들 좋아했다. 모든 스태프가 박지훈씨를. (웃음) 인기가 많았다.
<왕과 사는 남자>
제작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 감독 장항준 출연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전미도 | 배급 쇼박스 | 개봉 2월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