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컷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를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 ‘주관적 내적 현실’은 내 머릿속에 있는 무의식과 환상의 세계이다. 우리가 밤에 꾸는 꿈, 낮에 하는 공상,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욕구, 두려움은 내적 현실에 존재한다. 두 번째, ‘객관적 외부 현실’은 내가 마음대 로 바꿀 수 없는 엄격한 외부 세계이다. 세 번째, ‘중간 영역’은 내면의 환상과 현실의 제약이 타협하고 공존하는 중간지대이다.
<토이 스토리>는 이러한 중간 영역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해냈다. 방문이 닫히고 놀이가 시작되면 일회용 포크와 나이프는 살아 움직여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고, 카우걸 복장의 헝겊 인형은 비밀 요원이 되어 출동한다. 아이의 내면 세계에만 존재하던 환상을 외부 세계의 현실적 대상에 마음껏 투사하며 중간 지대는 활기를 띤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어른, 즉 객관적 현실이 침입하는 순간 장난감들은 다시 뻣뻣한 플라스틱, 흐물흐물한 솜뭉치로 돌아간다. 그렇다. 놀이(play)는 환상과 현실의 중간 지대에서 일어난다. 놀이가 환상 세계의 일이었다면 자신이 진짜 우주 전사라고 철석같이 믿던 초기의 버즈처럼 아이들은 현실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 테고, 외부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너 왜 그냥 돌멩이를 갖고 케이크인 척을 해?”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놀이에서 배제되고 말 것이다.
문이 닫히면 시작되는 마법: 환상과 현실의 접경지대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놀이를 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놀이를 통해 신체적인 성장을 도모하고 생존에 필요한 움직임을 익힐 수 있다. 인지능력이 발달하면서 놀이가 내면에 억압되어 있던 공포, 분노를 분출하는 장이 되기도 하며, 간절히 소망하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실현되기 어려운 욕구들을 놀이를 통해 충족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관계맺기에서 좌절을 겪으며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한 보니는 놀이 중 ‘결혼’이라는 주제를 반복해 다룸으로써 다른 사람과 친밀감을 나누고 싶은 욕구를 진솔하게 표현하면서도, 결혼식이 무사히 종료되기 전 방해받고 파괴된다는 점에서 자신이 겪은 곤혹감과 상처받은 마음을 재현해 방어하고 치유하려 시도하는 듯 보인다. 또한 현실에서의 보니는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는 데에도 용기를 쥐어짜야 하는 아이인 반면, 놀이하는 동안에는 흥분된 목소리로 살인사건을 고발하고 해결하는 등 내면에 있는 모험심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공격하는 자, 방어하는 자, 아픈 사람, 치료하는 사람의 입장을 혼자 대변하면서 관점의 전환을 연습하고 타인의 욕구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생애 최초로 죽음에 대한 원초적이고 실존적인 공포를 강렬하게 겪고 있음을 반영하듯, 보니도 ‘렉스’를 독살하지만 한번의 키스로 살려내면서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두려움을 이겨낸다. 이렇듯 아이들은 놀이라는 중간 영역에서 수도 없이 소멸하고 부활하며, 이기고 지는 세계를 경험한다. 안전지대 안에서 무수한 패배와 죽음을 통해 좌절을 길들여보지 못한 아이들은 엄격한 외부 세계에서 진짜 상처를 입었을 때 과연 회복할 수 있을까.
릴리패드가 갖지 못한 것: 진정한 놀이의 조건
놀이의 필요성은 알겠다. 그런데 <토이 스토리>의 전통적인 장난감들은 마치 계급이라도 나누듯 태블릿/전자기기를 진정한 놀이 대상으로 취급해주지 않는다. 말문이 트이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터치하여 유튜브에 접속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요즘 시대의 아이들이 본다면 어리둥절할 만한 대우다. 물론 보니의 오랜 친구들이 근거 없는 무례를 범한 것은 아니다. 심리학계에서 말하는 ‘건강한 놀이’에는 몇 가지 조건이 따른다. 우선, 장난감이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된다. 즉 놀이의 시작, 전개, 마무리는 전적으로 아이의 선택과 통제하에 있어야 하며 그 안에서 상상과 변형은 자유로워야 한다. 또한 칭찬, 물리적 보상 같은 외부 목표가 아니라 놀이 과정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 하며, 아이는 순수한 호기심과 재미를 따라 자발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릴리패드는 이 조건을 얼마나 충족하는가? 보니가 릴리패드로 즐기는 활동은 대체로 매끄러운 액정 너머의 버튼을 열심히 눌러 점수를 올리는 게임에 불과하다. 아이의 상상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놀이가 아니라, 통제된 ‘게임’. 진정한 놀이가 그 주인에 의해 규칙이 즉석에서 해체되거나 변형, 재창조될 수 있는 반면, 디지털 게임에는 성인이 계획한 명시적인 규칙과 구조가 존재한다. 보니는 자신의 행동을 게임 내 지시에 맞춰 수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을 뿐이며, 여기에 보니가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발휘할 만한 여백은 없다. 더욱이 ‘개구리를 점프시켜 점수 얻기’라는 목표는 ‘과정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진정한 놀이 규칙에 위배된다. 처음엔 게임이 주는 긴장감을 즐기는 듯하던 보니는 머지않아 이러한 외부의 보상에 저당 잡혀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이건 명백한 ‘가짜 놀이’이거나 ‘과제’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릴리패드로 대변되는 디지털 세계를 놀이의 파괴자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네모반듯한 액정 화면은 아이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차가운 벽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공간을 넘어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사회적 광장이기도 하다. 보니가 좀더 복잡한 가상 세계를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면, 장난감을 손에 쥐고 그랬던 것처럼 마우스와 키보드를 쥐고 게임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경험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화면 너머의 타인과 조율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보니의 방이 중간 지대가 되어주던 것처럼 온라인 세상이 중간 영역이 되어 현실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상황, 감정을 접하고 극복하면서 엄격한 외부 세계에 발을 단단하게 붙일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인간의 생애주기에 따라 ‘중간 영역’이 디지털 가상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다만, 이 디지털 놀이의 영토가 건강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보니의 부모가 지각했듯 어른들의 정교한 관리와 감독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스크린 속 무분별한 정보와 유해한 자극에 무방비로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며, 무엇보다 가상공간이 주는 전능감에 취해 엄격하고 차가운 ‘객관적 외부 현실’을 망각한 채 환상 속에만 갇혀 지내지 않도록 현실과의 끈을 붙잡아주어야 한다.
어떻게 붙잡냐고? 인간은 과거의 영향을 받는다. 자기만의 환상 속에 갇힌 성인이 되지 않으려면 생애 초기부터 실체가 있는 장난감을 충분히 갖고 놀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는 일종의 전능감의 환상에 푹 빠져 있다. 배가 고파 울면 입에 먹을 것이 물리고, 졸리면 잠이 들도록 토닥여주니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며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느끼는 나르시시즘의 시기를 겪는 것이다. 그러나 아기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세상이 마음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객관적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잔인하고도 필연적인 현실을 아이가 부드럽게 받아들이도록 돕는 심리적 매개체가 바로, 손으로 만지고 소유할 수 있는 입체적 실물 대상이다.
파괴와 생존: 장난감이 가르쳐준 세상에 대한 신뢰
아이들은 놀이 중 장난감을 격렬하게 부수고 공격하는 행위, 그리고 장난감이 그 공격을 받아내고도 살아남는 결과를 반복해서 목격하며 엄청난 심리적 도약을 이룬다. 우선, 아이는 장난감이 자신의 마음대로 파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원하는 대로 없앴다 만들었다 할 수 있는 환상 속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파괴적인 행동에도 상대가 똑같이 화를 내거나 보복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일관된 모습으로 버텨주는 것을 확인하면서 장난감을 위시한 외부 세계가 자신의 공격성보다 훨씬 강하고 안전하다는 현실을 알아챈다. 자신이 아무리 거친 감정을 쏟아내도 세상은 망가지지 않는다는 신뢰와 안정감을 확보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장난감을 자신과 분리된 인격체로 인정하면서 비로소 자신과 다른 대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염려하는 능력이 발달하게 되며, 최초로 내면의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인형에게 사과하며 꼭 껴안아주는 돌봄과 배려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유아적인 나르시시즘이 해체되는 순간이자 성숙한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첫걸음이 어린 시절 물고 빨던 애착 인형과의 사투 속에서 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토이 스토리>를 돌아볼 때 장난감들은 시리즈 내내 험하게 던져지고 바닥을 굴러다니며 훼손되면서도 변함없이 아이들의 침대 위, 상자 안에서 주인을 기다리며 살아남아주었다. 앤디가 우디의 팔을 손상시켰다고 해서 그 둘의 우정이 변할 것이라고 앤디는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앤디는 연인과 다툴 때에도 ‘우리가 지금 서로에게 화가 났지만, 이 다툼이 우리의 사랑을 망가뜨리지는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충동과 욕구를 다 받아내고도 늘 그 자리에 안전하게 생존해주는 대상이 존재했기에, 앤디는 건강하게 자라 어른의 세계로 걸어 나갈 수 있었고, 보니는 장난감들과만 간직하던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진짜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물리적 실체를 가진 장난감들의 마법이 아동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 SNS 피드가 온통 <토이 스토리> 굿즈로 도배된 것처럼, 현대의 어른들은 아이들 못지않게 장난감의 세계에 열광한다. 누구보다 차가운 표정으로 가방에는 깜찍한 인형을 부적처럼 달고 다니는 직장인들, 슬라임이 주는 촉각적 쾌감에 중독된 어른들이 흔하다. 성인이 된 우리는 손끝으로 전해지는 아날로그의 아둔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갈망한다. 자신을 억누르는 엄격한 현실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를 수 있었던 유아기의 안전한 환상을 재현하는 듯하다. 내 소중한 장난감들은 요구하지 않아도 나만을 바라볼 것이고 나의 지저분한 비밀을 알고도 판단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서랍 속에 처박아두거나 분리수거함에 넣어버린다고 해도 상처받을지언정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코 나를 혼자 둔 적이 없던 수많은 솜뭉치들. 이 매끄럽고 차가운 디지털 사회 속에서,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느끼고, 껴안을 수 있는 장난감이 과연 인간의 구원자가 될 자격이 여전한지 <토이 스토리 5>가 선명하게 보여준 것 같아 기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