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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홍상수라는 지겨움과 대적하기 - 홍상수 데뷔 30주년 특집, 기획의 변

2024년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여행자의 필요> 은곰상 심사위원대상 수상 후. GettyimagesKorea

“현상으로서 홍상수는 지겨운 일이다.” 2004년 당시 <씨네21>의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편집위원이 나눴던 한국영화 결산 대담에서 김소영 평론가가 꺼낸 말이다. 홍상수 감독이 5번째 장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내놓았을 때다. 1996년 데뷔 이후 8년쯤 됐을 때, 이미 홍상수 감독에 대한 담론은 차고 넘쳐 ‘지겨운 현상’으로까지 말해졌던 것이다. 그의 34번째 장편을 만난 우리는 훨씬 더 크게 부푼 지겨움 속에서 홍상수를 논해야 한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났고 홍상수는 29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다. 지독한 성실함이다. 하여 지금 홍상수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거나 쓰려는 자들은 피할 수 없는 자기검열에 시달리고야 만다. 반복과 차이라든지, 공간과 장소의 대비라든지, 순환구조라든지, 남성성의 추함이라든지, 시간 놀이라든지 하는 비평의 거의 모든 수사가 홍상수에 관해 진즉에 쓰였기 때문이다. 신작을 두고 그의 전작을 언급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홍상수란 기계장치의 작동 논리에 갇혀버린 것 같다.

가장 큰 두려움은 이 기계장치의 동력이 끊기지 않고 계속 영화를 찍어낸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무한한데, 언어는 너무나 협소하다는 한계를 매해 절감하게 만든다. 잡지 기사도 마찬가지다. 기사의 형식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편이다. 리뷰, 비평, 제작기, 인터뷰 등등. 필자의 핑계일 수도 있지만, 전 세계 영화잡지에서 홍상수에 관해 하지 않은 시도를 찾아보긴 힘들다. 어떻게든 자구책을 마련하려 할 때마다 그는 또 다른 세계로 유유히 떠나버리고 자신을 갱신한다. 그런데 바로 이주, 그의 데뷔 30주년 특집으로 잡지 한권을 빼곡히 채워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패배감이 찾아올 때마다 과거의 현인들은 어땠는지 다시 살피게 된다. 김소영 평론가의 발언을 조금 더 읽어보자. “홍 감독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싶다는 욕구가 먼저다. 너무 평가절상돼 별로 말하지 않는 것이 담론의 생산을 멈추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중략) 똥개 훈련에 응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 있다.” 똥개 훈련이라니! 마음이 조금 아프고 왠지 등판에 복슬복슬한 털이 나는 것만 같다.

김소영 평론가만의 주장은 아니었다. 홍상수 감독의 대표적 지지자였던 허문영 평론가도 일견 동감했다. 같은 대담에서 그는 “너무 가혹한 표현이지만 그들(평자)을 파블로프의 개처럼 훈련시켜서 몇개의 힌트를 던져주는 순간 헐떡거리면서 반복하고 별 의미 없는 것에 집착하고 의미 있는 것을 놓치게 한다”라며 당대 비평계를 지적했고, “스스로도 이 짓(홍상수를 비평하기)이 의미가 있나 반문”한다고 입을 떼기도 했다. 좋은 단서다. ‘그래, 나만 똥개는 아니었구나. 다들 헐떡거렸구나. 어차피 앞으로도 홍상수와 마주해야 할 테니 더 적극적으로, 조금이나마 다른 박자로 헐떡거려보자.’ 사설이 길었지만, 이번 특집은 이러한 마음으로 꾸렸다.

포기하진 않아 왔다. 최신순으로,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때는 오랜만에 출연배우의 제작 일지를 부탁하여 하성국 배우에게서 아주 재밌는 원고를 받았다. <수유천>에 관해선 김민희 배우론으로 작품에 접근했으며, <여행자의 필요> 때는 여러 필자가 생각하는 홍상수 영화의 조건들을 겹치고 모아봤다. 이번 특집에선 그의 필모그래피를 다양한 설정과 요소들로 쪼개어 홍상수 월드라는 게임의 선택지로 녹여냈다. <씨네21>에서 흔히 하지 않았던 일이다. 또 그에 대한 국내외 비평담론의 역사, 즉 관념적 계보를 되짚어보았다. 관념적 계보뿐 아니라, 그가 촬영지로 골랐던 곳들을 엮어 물리적 지도로 그리기도 했다. 홍상수를 구성하는 질료가 워낙 풍부히 쌓여왔기에, 홍상수에 관해서만 가능한 시도들이었다.

2025년 제78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홍상수 감독. GettyimagesKorea

다르게 말해보자. 지금의 관객과 평자들에게 ‘지겨움으로서의 홍상수’는 이미 주어진 현상이다. 이 지겨움을 탐구의 연료로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무기다. 현대 영화, 적어도 한국 영화산업의 양태 안에서 자기만의 독자 체계를 만들어 유의한 성과를 지속해서 내는 이는 홍상수가 유일하다. 1930년에 태어나 1971년에 감독 데뷔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지금껏 40편의 장편을 만들었다. 2000년에 데뷔한 봉준호가 8편, 1992년에 데뷔한 박찬욱이 12편을 연출했다. 34번째 장편이란 것은 새삼 어마어마한 숫자다. 9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세계 영화의 총아들이 하나둘 영화 바깥으로 이주하거나 경제적 과작에 빠진 지금, 홍상수는 그 작동 방식만으로도 소중한 사례다.

홍상수는 공장장으로서의 작가다. 폐기되었다가 어느샌가 스멀스멀 올라오곤 하는 앤드루 새리스의 고루한 20세기식 작가이론을 지금 시점에 적용할 수 있는 귀한 대상이다. 앤드루 새리스는 작가이론의 최종 심급으로 ‘내적 의미’를 주창했다. 이는 “감독의 독자적 개성과 영화적 소재 사이의 긴장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즉 감독의 스타일과 어떠한 체계(주로 스튜디오가 주는 소재)가 힘을 맞댈 때 느껴지는 무언가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현장에서 발해지는 감독의 온도”, 새리스는 베르그송의 뉘앙스에서 ‘약동’(Élan)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작가로 불린 이들, 이를테면 포드, 히치콕, 호크스는 영화를 수십, 수백편씩 찍는 공장장들이었다. 양적 토대로 연출자의 테두리를 두껍게 덧댈 때마다, 빗대자면 시멘트를 발라야 하는 벽이 커질 때마다 벽돌 사이사이 균열에서 포착되는 약동감이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홍상수라는 지겨움과 대적해야 할 때 부릅뜨고 봐야 하는 바로 그것이다.

홍상수의 근본적 연출 지론은 데뷔 이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제작 방식도 균일화했다. ‘영화제작전원사’라는 체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만 강제적으로 영화를 찍어낸다. 아주 금욕적이고 전략적인 폐쇄 정책이다. 홍상수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사형수 탈출하다>를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으로 거론한 바 있다(<씨네21> 752호). 그 이유가 흥미롭다. 두 작품에서 브레송이 원하던 연기 지도가 무참히 실패했다는 게 그 근거다. 주연배우들의 걸출한 힘과 매력이 ‘미스캐스팅’(Miscasting)으로 이어진 점이 재밌다는 것이다. 부러운 감독으로 에릭 로메르를 꼽으며 “소재와 작가 사이의 관계”가 마음에 든다는 것도 고전적 작가이론과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홍상수라는 지겨움과 대적하는 것은 우리뿐 아니다. 홍상수 본인마저도 싸움의 주체다. 강제성을 부여한 체계 속에 자신을 개입시켜 영화 속의 어떠한 ‘미스캐스팅’, 즉 온갖 배치 사이의 틈을 발견하려 한다. 이미 주어진 것들을 마주하되, 그것들의 타성을 되도록 피하려는 것이다. 공적 세계의 완벽주의를 사적 체계의 완벽주의로 소거하려는 이독공독의 방책이다(이 맥락에서 최근 홍상수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이는 조윤희 배우라 느낀다).

그러니 홍상수가 바라는 것과 최대한 대척에 있는 것들을 봐야 한다. 그가 매번 예쁘다, 아름답다,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때론 추하고 더럽게 여기기도 해야 한다. 자연스레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동화’라⋯. 마지막 말장난,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에서 동화(하성국)는 애인의 가족과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자기 시를 암송하고 남들에게 적당히 무시당한다. 아마 연출자는 동화의 시를 어여삐 여겼을 것이다. 그외 작중 인물들을 냉소하려는 듯한 화면과 대화의 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단 그의 언어에 동화되지 말고 반대로 생각하며 물꼬를 터보자. “꽃이 피네. 밤에 꽃이 피네. 꽃이 피면, 환해지고 무섭지 않아요. 꽃이 피네. 밤에 꽃이 피네. 꽃이 피면, 환해지고 무섭지 않아요.” 이게 대체 무슨 시야. 여하간 이런 마음으로 이번 특집을 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