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터뷰] “규칙을 벗어나는 순간 사랑이 시작된다”, 개막작 <세븐 스텝> 안드레아스 외만 감독

모든 사랑이 일곱 단계를 거친다고 믿는 여자 엘이 있다. 요제프는 그 규칙에 기꺼이 동참하지만 여섯 번째 단계에 이른 어느 날 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세븐 스텝>은 사라진 연인을 찾아 스톡홀름과 파리 그리고 서울을 헤매는 로맨스인 동시에 사랑을 기억한다는 것에 관한 미스터리영화다. 데뷔작 <심플 사이먼>으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숏리스트에 올랐던 안드레아스 외만 감독은 오랜 협업자인 스웨덴의 팝스타 베로니카 마기오와 함께 이 낭만적인 미로를 설계했다.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규칙이 어느새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변명이 될 때, 반대로 상실의 기억은 지나간 시간을 복원하는 대신 상대를 새롭게 발견할 기회를 제공한다. 7년 전 로스앤젤레스의 한 바에서 냅킨 위에 적은 아이디어는 마기오의 첫 장편 주연작이 되었고, 촬영을 했던 서울의 밤을 지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제15회 스웨덴영화제 개막작으로 <세븐 스텝>을 들고 한국을 찾은 외만 감독은 촬영부터 상영까지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낯선 스웨덴영화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은 끝내 만난다는 인연의 끝자락, 아니 시작을 느낀다.

- <세븐 스텝>의 첫 아이디어는 10여년 전 로스앤젤레스의 한 바에서 베로니카 마기오와 냅킨에 무언가를 적으면서 시작됐다고 들었다.

베로니카와는 이전부터 뮤직비디오 작업을 함께했다. 시각적인 취향도 비슷했고 언젠가 다른 무언가를 함께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 스웨덴에서 한동안 제대로 된 사랑영화가 나오지 않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어떤 단계들을 거치게 될까.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사랑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들어보자는, 조금 엉뚱한 생각에 도달했다.

- 엘은 사랑이 우연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일곱 단계를 거친다고 믿는다. 왜 하필 일곱 단계인가. 실제 심리학이나 관계 이론에서 가져온 건가.

그렇지는 않다. 누구나, 특히 젊을 때는 사랑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나. 나 역시 그랬고 베로니카 역시 자신의 연애 경험이 있었다. 그런 개인적인 경험들이 반영됐다. 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현실보다 조금 고양된 설정을 좋아하기도 한다. 게다가 7은 영화적인 마법이 깃든 숫자다. <7인의 사무라이>처럼. (웃음) 사랑의 여러 국면을 하나씩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금의 단계들이 만들어졌다. 각본을 5년에서 7년 가까이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어디서 무엇이 왔는지 정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이 섞였다.

- 흥미로운 것은 보통 사랑에 빠지면 규칙을 잊는데 엘은 정반대라는 점이다. 엘은 사랑이 깊어질수록 규칙을 만든다. 일곱 단계는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이라기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처럼 보인다.

맞다. 일종의 탈출 시스템이다. 엘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가 깊어져 떠나는 것이 힘들어지기 전에 언제 빠져나가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규칙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사랑을 관리하는 시스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에서 도망치기 위한 시스템인 셈이다. 동시에 엘은 무의식적으로 그 시스템을 깨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서 대신 깨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 전작에서도 인물이 무언가를 잃고 그 빈자리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다뤘다. 넓게 보면 <세븐 스텝> 역시 사라진 사람의 흔적을 더듬는 영화다. 당신에게 상실은 어떤 의미인가.

내 영화가 상실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한참을 침묵한 후) 질문을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삶의 많은 부분이 상실에 관한 것이니까.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어린 시절을 잃고 사랑을 놓치기도 하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서 이전의 무언가를 뒤에 남긴다. 가까운 사람을 잃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누구나 다 안다. <세븐 스텝>은 특히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누군가가 사라져버리는 상실을 다룬다. 그래서 더 답답하고 미스터리하다. 나는 글을 쓸 때 주제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 완성하고 돌아본 뒤에야 발견한다. 어쩌면 삶에서 무언가를 잃는다는 감각이 생각보다 깊은 곳에서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이터널 선샤인>이 <블루 발렌타인>을 만난 영화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두 영화 모두 시간과 사랑을 다룬다. 한쪽은 좀더 현실적이고 다른 한쪽은 훨씬 고양되어 있다. 나는 그 중간 어디쯤에 가고 싶었다. 특히 시각적인 부분과 마법적인 요소에서 그렇다. 물론 두 영화만 참고한 것은 아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왕가위 영화의 분위기도 떠올렸다. 기억 속 빛이나 네온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를 좋아하면 많은 작품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일이다.

- 촬영감독 요세피네 오베가 이 작품으로 굴드바게 촬영상을 받았다. 특히 기억을 표현하는 빛과 네온이 인상적이다.

기억을 어떻게 꿈처럼 보이게 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기억을 떠올릴 때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지 전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않지 않나. 어떤 사람이나 사물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남기도 한다. 사운드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기억마다 어떤 정도의 감각을 줄지 일종의 지도를 만들어놓았지만 현장에서 장면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바꾸기도 했다. 준비는 많이 하되 촬영 중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어두고 싶었다

- 엘은 스톡홀름, 파리, 서울을 떠돈다. 왜 서울을 선택했나.

스톡홀름이나 파리와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도시가 필요했다. 언어 역시 서양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면 했다. 엘이 완전히 이방인이 되어 길을 잃을 정도로 거대한 도시여야 했다. 서울에 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서울이라고 썼다. 제작비 문제로 불가능했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겠지만 우선 서울에서 찍는 것을 전제로 했다. 해외 촬영을 지원하는 프로덕션 서비스 업체와 함께했고 스웨덴대사관의 도움도 받았다. 두 나라 사이에서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연결해줄 통로가 있었다면 좀더 수월했을 텐데, 이번에 협약을 맺는다고 들어서 반갑다.

- 직접 영화에 담은 뒤 서울에 대한 인상이 달라진 부분이 있나.

영화에 담긴 서울이 내가 보고 느낀 서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다시 찍는다면 외부 공간을 더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즉흥적으로 장소를 발견하고 싶다. 한국 관객에게 익숙한 도시를 외부인의 눈으로 다시 보여주는 과정에서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장소나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