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속 기획 2] 부산영상위원회 아카이브 총서 <부산의 장면들> #3, ‘부산, 영화’ <넘버원> 가족을 품은 고향, 부산

서울 생활에 지친 아들이 고향에 돌아온다. 엄마는 그런 자식을 반기며 집밥을 차려준다. 여기까지만 보면 영락없는 가족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넘버원>은 여기에 신비한 미스터리를 더한다.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눈앞에 큼지막한 숫자가 뜨고, 그 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걸 깨달은 아들이 엄마의 식탁을 피한다는 것이 바로 그 설정. 배우 최우식이 아들 하민, 장혜진이 엄마 은실을 연기해 현실감을 더한 이 모자는 서로가 답답할 따름이다. 날이 갈수록 시야가 달라지는 여느 부모 자식 관계가 그러하듯이.

이 실타래가 꼬이고 풀리는 무대는 부산.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자 끝을 예감하는 곳, 잊었던 추억을 되살리는 곳,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는 곳 모두 한 도시다. <넘버원>의 부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작품의 정서를 이루는 핵심이기에, 배우들의 대사부터 영화에 등장하는 요리들까지 부산 색채가 짙다. 그 팔레트를 들었던 김태용 감독, 문용군 촬영감독, 김보미 미술감독이 기억하는 ‘부산의 장면들’을 돌아본다.

하민(최우식)과 은실(장혜진)은 아버지이자 남편을 잃은 데 이어 큰형이자 장남까지 잃었다. 영화 초반 드러나는 이 상처는 둘 사이의 오랜 단절을 설명한다. 장례를 마치고 부산 중구 영주로의 고지대를 걸어 내려오는 모자 사이는 좁히기 힘들어 보인 다. 슬픔이 흐르는 장면이지만, 문용군 촬영감독은 이를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로케이션 헌팅 당시 보자마자 머릿속에 콘티가 명확하게 그려진 유일한 장소”를 배경으로 찍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절대 움직이지 말자. 공간이 주는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이 감정을 표현하도록 하자.” 다짐한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하민과 은실에게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한 첫 장면이기에 정서적으로 인상 깊게 만들고 싶었다. 이야기상 시간 설정이 늦은 오후이기도 해서 석양 느낌을 구현하기 위해 룩업 테이블(L.U.T)에 선셋 그러데이션 필터를 사용했다. 영화 전체적으로 소프트 필터를 쓰긴 했지 만, 색감을 위한 필터를 사용한 건 이때가 유일하 다. 참고로 이 장면 촬영 직후 무조건 예고편에 사용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는데, 예상대로 예고편에 담겨 무척 뿌듯했다.”

통 밥을 먹지 않는 하민을 걱정하는 은실의 마음도 모르고 꽃이 활짝 피었다. 이 장면을 찍은 곳은 부산 벚꽃 명소로 유명한 동대신동 삼익아파트 단지. 시나리오에는 없던 장면이지만, 촬영 당시 부산에 벚꽃이 만개해 김태용 감독과 제작진이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장소가 워낙 멋진 곳이라 앵글은 별 고민 없이 잡았는데, 화면 속 해가 닿지 않는 그림자 부분과 해가 닿는 부분의 밝기 차이가 심해서 화면 밝기를 낮추고, 후반작업에서 어두운 부분을 조금 밝히는 방식으로 벚꽃 디테일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또한 렌즈의 심도를 적절히 선택해 배경 디테일도 살리면서 인물에 집중할 수 있는 화면을 만들려고 고민했다.”(문용군 촬영감독)

집을 어떻게 꾸미고 치우는지는 한 사람에 관해 많은 걸 말해준다. 김보미 미술감독도 은실의 공간이 은실의 속내를 드러내주길 바랐다. 따뜻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담고자 웜톤을 적극 활용했고, 나무나 천처럼 온기 어린 소재로 가구를 구성했다. 가족과 함께 살던 집, 혼자 사는 집의 차이도 고려했다. 과거 은실 집에는 생활감을 보여줄 다양한 소품과 살아 있는 식물을 심은 화분을 뒀다면, 현재 은실 집에는 외로움이 느껴지도록 소품을 과감히 덜어냈다. 한쪽에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쌓는 등 시간이 멈춘 듯한 생활의 흔적도 담아냈다.

“부산 시내와 용두산공원 등 야외 로케이션 역시 영화의 전체적인 톤에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장소를 선정하고자 했다. 또한 과거 시점을 구현하는 장면에서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간판과 로고 등을 자료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하여 현장에서 덧입히거나 새롭게 디자인했다. 이후 후반 CG 작업과 자연스럽게 연계되도록 준비함으로써 시대적 현실감을 높이고, 관객이 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김보미 미술감독)

“유명한 맛집들에서의 몽타주 신은 각 식당에서의 촬영 분량이 많지 않아 짧게 치고 빠지는 식으로 최대한 빠르게 진행했다. 현장을 통제하는 제작부 입장에서는 인파가 많은 동네에서의 촬영이 힘들었겠지만, ‘영화의 도시’ 부산답게 시민들이 협조를 잘해주셨다. 그래서인지 내 기억으로는 어렵지 않게 촬영했던 것 같다. (웃음) 다만 영화에 나오는 식당들이 관객들에게도 이미 노출이 많이 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이장면이 극의 흐름을 깰까 봐 우려스럽기도 했다. 이 또한 부산 출신 김태용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장소들 이고, 영화 속 인물들의 생활권과도 맞닿아 있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화국반점 빼고는 식사 없이 촬영만 하고 바로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맛집들의 음식을 먹어볼 기회가 없어 참 아쉬웠다.”(문용군 촬영감독)

집밥을 피하고 싶은 하민은 은실을 데리고 외식을 시도한다. 부산 시민 혹은 부산 여행 좀 해본 사람들에게는 익숙할 맛집들로 말이다. 이 식당들은 모두 부산 출신 김태용 감독이 평소 즐겨 찾던 곳들. 할매집, 18번완당 집, 종각집, 화국반점, 거인통닭 등 <넘버원>에 등장하는 가게들만 방문하는 맛집 투어도 충분히 가능할 정도다. “업력 50년 이하의 가게는 안 끼워준다”는 김태용 감독의 철칙까지 있었다고 하니 맛은 믿어볼 만하다!

김보미 미술감독에 따르면 모자의 집으로 섭외된 아파트는 재건축이 예정된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건물이 심하게 노화한 상태였다. 이에 미술팀이 외관의 훼손이 심한 부분에 직접 페인트칠을 해 보수했으며, 소품팀은 빨랫감, 장독대, 평상, 자전거, 동백나무 화분 등을 배치해 공간에 정겨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결과 이 공간은 김태용 감독이 가장 아끼는, 모자가 오랜만에 상봉하는 장면의 무대가 되었다.

<넘버원>을 “부산 출신 감독이 만든 부산 영화”라고도 요약한 김태용 감독은 이 작품을 계기로 알게 되었다. “부산 분들이 평소에 시큰둥하게 말을 내뱉는 경우가 많지만, 속은 얼마나 뜨겁고 다정한 사람들인지를.” 유년 시절의 친구들부터가 그랬다. 다소 거칠었던 전작 <거인> <여교사>를 보고는 별말이 없던 친구들이 <넘버원>을 보고는 많이 울었다며 위로받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시민들의 협조에도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촬영을 위해 도로를 통제 하면 시민들이 묻곤 했단다. “영화 제목이 뭔데예? 파이팅! 대박 나이소!” 서울에서와는 다른 경험이었다. 부산 친구들과 시민들의 응원에 힘입어 완성한 <넘버원>은 김태용 감독에게 또하나의 타임캡슐이 되어주었다고.

제작진은 스치는 계단에도 의미를 실었다. 김태용 감독은 “하민이 은실을 떠날 때와 다시 돌아올 때의 마음”이 실린 곳으로, 김보미 미술감독은 “평탄하지 않았던 은실의 인생”을 은유한 곳으로 계단을 바라봤다고 한다. 김태용 감독이 덧붙였다. “<넘버원>에서 재밌는 부분은 바다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게 부산은 산의 동네다. 우리네 부모님이 일을 끝내고 비탈을 걸어 올라가던, 그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바다에 비친 달빛에 마음을 달래던 동네 말이다.”

사진제공 바이포엠스튜디오